노인은 동전을 원한다 (완)

터무니없이 불쾌한 꿈을 꾼 듯한 기분은 금세 사라졌다.

따사로운 햇살과 포근한 바람이 느껴진다.

 어렴풋한 의식으로 차향을 닮은 은은한 향기가 스며든다.

 사울은 새끼 고양이의 발바닥마냥 말랑말랑한 머리맡에 볼을 부비며 자신의 심정을 짤막하게 표현했다.

 

  "....냥..."

  "....냥?""설마 머리가 이상해 진 건..."

 

 낯익은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오자, 사울은 정신을 잃기 직전의 상황을 비로소 떠올리곤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곤 자신이 칙칙한 지하도나 차디 찬 우물 속이 아니라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잎사귀들을 가득 매단 나무의 그늘 아래 누워 있었음을,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레이스의 허벅지에 머리를 누인 채로 그녀와 다른 두 동료들의 근심어린 시선을 받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방금 전까지 정령들을 부리고 있었던 듯 몸 주위에 희미한 빛의 궤적들을 두르고 있는 베아트리체가 허리를 굽히며 물었다.

 

  “어딘가 아픈 곳이 있나요? 혹시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린다거나 하지는 않아요?”

  “음...딱히 통증은 없지만 머리가 약간 무겁네요.”

  “아뇨. 상당히 무거워요. 그러니까 당신 머리를 내 허벅지에서 좀 치워주겠어요?”

  “....그나저나 내가 어째서 정신을 잃었던 거죠? 내가 던진 창이 브레스를 전부 태워버리고 녀석 이마에 깊이 박히는 것까진 똑똑히 봤는데 그 이후론 기억이...”

  “사우울~!”

 

  베아트리체는 청년이 짐짓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에 손을 얹으며 불쌍한 눈빛으로 그레이스의 항의를 무마하는 광경에 실소를 머금으면서도 성실하게 대답했다.

 

  “그 창은 카다프 씨의 의념에 동조한 정령들이 만들어 낸 일종의 정신체라, 당신의 의식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어요. 하지만 카다프 씨가 그 사실을 모르고 끝까지 연결 상태를 끊어내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악령이 마지막 순간 떠올렸던 강렬한 의념들이 창을 통해서 당신에게 흘러들어 왔던 거죠. 카다프 씨, 이번엔 정말로 운이 좋았던 거예요. 정령들이 적극적으로 당신을 보호해주지 않았다면 아예 의식 자체가 날아가 버렸을지도 몰라요.”

 “....나 정말 괜찮은 건가요? 후유증 같은 건 없겠죠?”

 

 불치병 선고를 예감한 환자마냥 핼쑥해진 청년에게 정령사가 안심하라는 듯 웃어보였다.

 

  “해로운 기운들은 전부 몰아냈어요. 당분간은 어둠의 기운이 강해질수록 빨리 지친다거나 악몽을 자주 꾼다거나 하겠지만 심한 후유증은 없을 거예요.”

  “휴우~그 말을 들으니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사울 씨, 자잘한 얘기들은 가면서 잔뜩 해줄 테니까 일단은 리볼도외로 돌아가요. 의뢰주도 다시 만나고 신개본에 보고서도 제출해야 푹 쉴 수 있잖아요.”

  “알았습니다, 갑니다. 에구구구-”

 

 브루니가 짐짓 피곤한 얼굴로 재촉하자 사울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사울에게 남아있던 어둠의 기운들을 몰아내기 위해 하수도를 나오자마자 정령들이 충만한 숲속 깊은 곳까지 들어갔었기 때문에, 일행의 귀로는 꽤 멀었다. 그 덕분이랄까. 어렴풋이 퀸즈 게이트가 보일 즈음, 사울은 자신이 기절하기 직전까지 벌어졌던 기묘한 일들의 내막을 마지막 부분까지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 벨름의 동전에 담겨있던 악령의 정체가 대체 뭡니까? 혹시 셜린이 부리던 그 칙칙한 정령들의 변종 같은 건가요?"

 

 청년의 물음에 답한 건 그 방면의 전문가인 베아트리체였다.

 

  "어둠의 정령을 환영술의 원료로 쓰는 건 그 종들이 자아가 무척 약해서 소환자의 상념을 어그러짐없이 그대로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에서, 간단한 눈속임 정도라면 모를까 장기간 유지되는 환영술을 고등 생명체에게 걸어두려면 사전에 어둠의 정령을 목표물의 체내에 기생시켜서 상대의 정신저항을 회피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죠.

 하지만 그 악령은 자아가 무척이나 강했을 뿐더러, 컴퍼스로 위장한 분신이 발하는 환상만으로 목표물의 정신저항력을 낮춘 후 본체에서 발한 사념과 목표물의 상상을 뒤섞는 방식으로 상대를 현혹했어요.

 이토록 자아가 강하고 독특한 행동양식을 가진 정신체는 적어도 구대륙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동전에 담겨있던 악령은 신대륙의 특산물에 담긴 채로 구대륙까지 건너갔던 이곳 고유의 정령이든가 아니면....“

  “다른 차원의 생명체든가.”

 

 이야기에 열중하다 저도 모르게 끼어들었던 그레이스는 일행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자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동전의 제작자 벨름은 ‘차 상자’처럼 공간을 왜곡시키는 기술이 적용된 공예품을 많이 만들어냈잖아요. 어쩌면 그는 자신의 기술을 개량하는 도중에 악령들이 가득한 이계로 통하는 문을 열어버렸던 건지도 모르죠.”

  “어이쿠야, 그런 녀석들이 득실거리는 이계라구요? 어째 얘기가 점점 감당 못할 영역으로 가고 있는 거 같은데...”

 

 양팔로 몸을 감싸며 짐짓 몸서리를 치던 사울은 금세 진지한 얼굴로 돌아와선 일행들을 응시했다.

 

  “....그보다 사실 내가 정말로 알고 싶은 건 따로 있어요. 에우셰비오 씨 말인데...그가 동전을 미끼로 개척민들을 사지에 몰아넣었던 건 자의였을까요 타의였을까요?”

 

 세 사람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들은 청년의 심중을 짐작하고 있으니만치 확답을 내고 싶었지만, 결국 추측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먼저 입을 연 건 그레이스였다.

 

  “그의 영지에서 벌어졌던 학살은 아마 타의였을 거예요. 하지만 악령의 힘이 아무리 강했다고 한들, 그 이후에 에우셰비오 씨가 의식을 회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까요? 동전을 부수거나 멀리 던져버릴 기회가 단 한 번도 없었을까요? 나는 그가 옛 영화를 떠올릴 기념물에 대한 미련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타인의 미래를 스스로 포기했다고 생각해요.”

 

 베아트리체가 미미하게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몬스터 떼와 수백 명의 개척민들을 현혹시켰을 만큼 강력한 정령이 개인에게 그 힘을 온전히 집중한다면, 수십 년 동안 인간을 조종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거예요.”

  “글쎄요. 나는 에우셰비오 씨의 의사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은가 싶은데...”

 

 브루니가 말을 이어나갔다.

 

  “만약 에우셰비오 씨가 동전에 숨어있던 무언가에게 줄곧 홀려있었다는 게 진실이라 한들,

이제 와서 사람들이 믿어줄 리가 없잖아요.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괴로운 미래뿐이에요.”

  "......실은 정신을 잃고 있던 동안 이상한 영상을, 아니, 악령이 남긴 기억을 보고 있었습니다.“

일행들이 깜짝 놀라 자신을 바라보는 동안, 청년이 말을 이어 나갔다.

  “자신이 악령에게 홀렸었다는 걸 모르고 괴로워하다가 결국 자살을 택한 남자와, 영지의 마지막 주민이 자살하는 광경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는 에우셰비오 영주와, 그들의 행동을 연극마냥 감상하고 있는 악령의 감정이 계속해서 흘러들어 왔어요.

 악령의 감정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그 남자의 감정은.....도저히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겠습니다. 정신을 잃고 있지 않았다면 나도 그를 따라서 목을 그었을지도 몰라요.......그리고 에우셰비오 씨는.....그 때의 에우셰비오 씨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정신 나간 노인이 아니었습니다.

 잿더미가 된 고향을 복구하기 위해서 자진해서 이곳의 영주가 되었는데, 영주민들의 생활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믿었는데 어째서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졌는가...자신이 지금껏 해온 노력들은 이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는가....내가 지은 죄값을 이토록 잔인하게 치르게 된 것인가....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절규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악령이 에우셰비오 씨의 마음에 잠식한 건 아마도 그 직후였겠죠.

 괴로운 미래라....분명 그럴 거에요. 하지만.....나는 악령에게서 비로소 벗어난 에우셰비오 씨가 다시금 그 때의 마음을 되살릴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듯한 청년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한층 더 맑고 따스했기에, 세 사람은 어두운 기분을 떨쳐내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가 환상으로 도망치지 않고 자신이 짊어져야 할 것들을 감내하겠다고 결심해서, 자신은 물론이고 뉘우칠 수조차 없는 광인에게 가족들을 희생당한 사람들의 삶에도 조금이나마 변화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꽤나 어려운 일이겠지만...정말로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요.”

 

 일행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방금 전 사울이 그레이스에게 미소로 화답하는 광경을 짐짓 태연스레 바라봤던 브루니의 입가에 최고의 장난거리를 생각해낸 악동마냥 음흉한(?) 미소가 불현듯 떠올랐다.

 

  “아차, 그러고 보니 우리들은 당신이 깨어나길 기다리는 동안 전부 얘기했는데, 사울 씨 당신만 악령에게 홀렸을 때 어떤 환상을 봤는지 아직 고백하지 않았네요~”

  “...........음.....그러니까 그게....”

 

 그 말을 듣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뾰로통한 표정이 되어버린 그레이스가 눈에 띄게 창백해진 사울을 외면하며 확신이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보나마나 불결한 망상이 분명한데 굳이 들어볼 필요가 있으려나요?”

  "부,불결?! 나야말로 하늘에선 불그죽죽한 홍차비가 내리고 나무에는 총이 주렁주렁 열리는 낙원 따위엔 발끝 하나 들이밀고 싶지 않습니닷!“

  “이이이익!! 남의 꿈을 멋대로 괴기물로 바꾸지 맛!”

 

 티격태격하며 폭로전을 개시한 두 남녀와 그들에 의해 증인석에 강제로 호출되어 얼굴 가득 곤혹스런 표정을 더해가고 있는 베아트리체를 향해, 브루니가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아아, 할 수 없네요. 개인적으론 사울 씨의 이상향이 어떤 곳일지 꽤 흥미가 있지만, 그레이스 씨가 정히 원하지 않는다면 그 부분은 생략하고 ‘모두가 궁금해 할 부분’만 들어보죠 뭐.”

  “....아니, 전부 생략하셔도 아무 문제없습니다만.”

  “그러니까 나는 이 남자의 망상 따윈 조금도 알고 싶지 않다니까요!”

 

브루니는 그레이스에게 의미심장한 눈웃음을 던지며 명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울 씨, 당신이 환상에서 벗어나는데 결정적으로 도움이 된 기억은 ‘누구와의 기억’이었나요?”

 

 

  네 사람의 주위를 따사로운 햇살과 포근한 바람 대신 고요함이 가득 채웠다.

    휘이이이이잉

초원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바람이 석상마냥 굳어버린 청년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흩어내는 동안, 그레이스와 베아트리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브루니에게 시선을 옮겼다.

 세 여자의 시선이 교차한 건 그야말로 한 순간. 하지만 ‘자신이 절대적이고 완벽하며 평등한 애정으로 세상 모든 여성들을 널리 이롭게 하기위해(?)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청년을 갱생시키기 위한 제 1차 비밀협약’은 그 찰나의 시간동안 만장일치로 체결되었다.

 사울은 그 사실을 모르기에 헛되이 저항했다.

 

  “...어....그러니까 어떤 특정한 기억이 아니라 동료 여러분들과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어머나, 아무래도 난이도가 너무 높았나보네요. 좋아요, 그럼 사울 씨를 위해서 비슷한 뉘앙스의 다른 질문으로 바꿔줄게요. 자, 나와 그레이스 씨와 베아트리체 양이 물에 빠져서 후우적대고 있습니다. 사울 씨는 누굴 먼저 구할 건가요?”

  “비슷한 뉘앙스라니 대체 어디가?!!”

  “상당히 비슷한데요.”“매우 유사합니다.”

  “........”

 

 그레이스와 베아트리체가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브루니를 거들고 나서자, 사울은 비로소 자신이 사지(?)에 홀로 던져졌음을 깨달았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연신 훔쳐내며 시간을 벌던 사울은 결국 짐짓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하하하, 질문 자체가 너무 이상해서 대답하기가 곤란하네요. 친애하는 두 사수 분께선 나보다 수영을 더 잘하시고 베아트리체 양은 정령사니까 물의 정령을 소환하면....”

  "묻는 말에만 대답해 주세요.“라고 베아트리체가 말했다.

  “...그러니까, 엄마가 좋아 엄마가 좋아와 동급에 속하는 고차원적인 질문에 그리 쉽게....”

  “빨리 빨리!”라고 그레이스가 재촉했다.

  “큭! 이런 폭압적인 분위기에선 대답할 수 없어요! 묵비권을 철저하게 행사하겠습니닷!”

 

 그러자 브루니가 짙은 눈웃음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짐짓 충격을 받은 듯 양손을 입가에 가져가며 소리쳤다.

 

  “이럴 수가! 나는 재보(財寶)의 산에서 과감히 눈을 돌리고 사울 씨를 택했건만, 당신은 물에 빠진 나를 구하는 간단하기 짝이 없는 일조차도 못하겠다는 거군요! 아아, 이토록 괴로운 마음을 안고 계속 살아간다면, 언젠가 다시 한 번 비슷한 유혹을 받았을 땐 정반대의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저,정반대의 선택이라니!! 지금 무슨 끔찍한 소릴..!”

     철컥

 사울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금속음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세워놓은 무기의 끄트머리에 양손을 기댄 채로, 산탄의 마녀가 입을 연다.

 

  “별로 당신한테 흥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당신이 나 이외에 다른 여자를 더 높게 평가한다는 건 내 자존심이 용납지 않아요. 참고로, 내가 환상을 보면서 가장 먼저 겨냥했던 사람은 ...”

 

 그레이스의 의미심장한 눈초리를 견디다 못한 청년은 무의식중에 정령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베아트리체 양!! 이 여자들도 암흑의 기운을 듬뿍 쐰 거 같습니다! 당신의 도움이....컥! 대체 뭘 하려고 전격 팔찌를 착용하고 있는 겁니까!!”

 

 햇살을 받아 짙푸르게 빛나는 양 손목의 팔찌를 드르륵 소리 나게 돌리며, 정령사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카다프 씨,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정령사가 참가함으로써 주체할 수 없이 증가한 골라죽는 재미(?)에 관해 잠시 고찰한 후-

 “....말과 행동이 너무 다르잖아!!”

 

 -사울은 절규하며 앞으로 내달렸다.

 

  “앗!”“도망친다!!”

 

 세 여자가 외마디 소리와 함께 청년을 뒤쫓자, 페루초 평원에선 때 아닌 추격전이 벌어졌다.

 

  “결국 대답하지 못하겠다 그거죠?!!”

  “나중에 개별적으로 대답해 줄 테니까 좀 봐달라구요!”

  “웃기지 말아요!!!”(x3)

 

 여름의 태양이 내리쬐는 초원 가득 왁자지껄한 외침을 남긴 채로, 네 사람은 퀸즈 게이트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끝-

by 닉네임 | 2009/08/20 14:29 | 팬픽 중편 | 트랙백 | 덧글(0)

노인은 동전을 원한다 (9)

큭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동전'은 폭소했다. 대체 저 벌레 녀석이 방금 뭐라고 지껄인 건가. 실컷 도망 다니다 어쩔 수 없이 물구덩이에 뛰어든 주제에 뭐? 인간의 의지?

 콧수염을 바르르 떨며 전신을 뒤덮은 촉수들에 힘을 불어넣던 ‘동전’은, 그러나 다음 순간 멈칫했다. 낙하하는 인간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염의 눈부신 궤적이, 거기에 섞여있는 '희망의 색'이 몹시 거슬렸기 때문이다.

 소모한 힘을 회복하고 또 다시 유희를 벌이려면 십여 년을 기다려야 한다. 아니, 에우셰비오가 죽어버리면 본래의 장소에 강제로 돌아갈 수밖에 없으니, 최악의 경우엔 이번이 이 세계에서의 마지막 유희가 될지도 모른다. 헌데 이다지도 소중한 기회를 망쳐버린 것도 모자라 제 주제도 모른 채 망상에 빠져있는 녀석들을 바로 죽여버린다?.........차라리 인간 따위의 하등생물이 발악해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걸 제대로 확인시켜준 후에, 저 놈들이 품고 있는 희망의 불씨를 모조리 꺼뜨린 후에, 그 자리를 대신한 절망과 공포를 느긋하게 감상한 후에 녀석들을 죽이는 쪽이 훨씬 더 만족스럽지 않을까?

  찰나의 차이만으로도 생과 사를 뒤바꾸곤 하는 전장의 시간을, 악령은 이런 생각을 하며 허비했다. 물론 녀석이 상대하고 있는 필멸자들은 그따위 바보짓을 하지 않았다.

  빛이 번뜩였다. 처음에는 두 사수들의 총구에서, 나중에는 정령사의 뒤편에서.

‘동전’은 연이은 총상의 따끔한 감각 따윈 까맣게 잊을 정도로 후자의 빛에 마음을 뺏겼다.

 소환자로부터 멀어져가는 물의 정령에 의해 점점이 흩뿌려지며 어둠속에 거대한 나선의 궤적을 그리고 있는 빛의 입자들.

 그것들의 정체가 소위 ‘정령의 오브’라 불리는, 영체를 물질계에 보다 완벽하게 현신시켜주는 물질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악령은 체크 메이트에서 벗어나려고 악수(惡手)를 거듭하는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기사(棋士)와 똑같은 심정에 빠졌다. 설령 저 정령사가 빙한 계열의 기술을 시전할 셈이라고 한들, 녀석이 구사 가능한 해당계열 최고주문이 ‘블리자드’라는 허접스레기 뿐이라는 걸 뻔히 아는 이상 긴장하래야 긴장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엘리멘탈-

 

 하지만, 마침내 정령사의 입에서 터져나온 외침은 악령의 예상과 어긋나는 것이었으며-

 

                -페네트레이션!“

 

 그것이 불러온 효과 역시 ‘정령을 느끼는 자라면 누구나 구사할 수 있는 초짜 기술’다운 모습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전사에게 감싸인 채 이쪽을 향해 오른팔을 뻗고 있는 소환사로부터 푸른 빛깔의 눈부신 염이 뿜어져 나오자마자, 잔잔한 수면을 밝힐 정도로 바닥에 근접한 물의 정령과 그 주위에 흩뿌려진 수백 개의 오브들이 일제히 같은 빛깔로 물들었다. 그러자 어지간한 바람 따위에는 미동조차 하지 않을 수면에 점점 거센 파문이 번져나가더니 우물 벽 여기저기에서 물보라가 일기 시작했다.

 '인간 따위가 날 위협할 수는 없다'고 고집스레 되뇌면서도, '동전'은 인간들에게서 훔쳐냈던 ‘정령침투에 관한 기억들’을 저도 모르게 훑기 시작했다.

 

엘리멘탈 페네트레이션[elemental penetration;정령침투]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4대 원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령사 고유의 기술. 대개 전장에서 목표물의 속성 저항력을 일시적으로 감소시키기 위해 사용한다.

 

 

 열쇳말을 시작으로 네 인간들이 지금껏 경험해왔던 전장의 광경들이 두서없이 펼쳐진다.

    현실의 시간은 어김없이 흐른다.

  물의 정령이 우물 폭의 2/3를 지나치며 수면을 향해 전진한다.

그것이 수면에 닿는 순간 위기가 닥치리라는 걸 예감하면서도, 악령은 탐색을 계속한다.

   자신이 최상위의 포식자이며, 절대자이며, 각본가라는 사실을

 자신이 정한 배역을 거부할 수 있는 생명체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해야 하므로.

 

 

  ‘너는 앞으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기 위해 이 기술을 수도 없이 쓰게 될 게야.’

 

 정령사가 간직하고 있던 유년시절의 기억 하나가 악령의 주의를 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시울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맑디 맑은 눈동자에 단발소녀의 앳된 얼굴이 비친다. 노파의 손이 아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하지만 이것만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정령침투는 원래 인간의 마음을 정령들에게 온전히 전하기 위해서, 정령들의 마음을 인간이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의 선조들과 태고의 정령들이 함께 만들어낸 기술이었단다. 얘야, 우리들은 본래 싸우는 자가 아니라 감싸 안는 자였다는 걸.....너만은 언제까지나 잊지 않았으면 한단다.’

 

 

  주변의 대기에 몹시도 이질적이고 불쾌한 입자들이 섞여들기 시작한다.

 그래도 악령은 오로지 먹잇감들의 저항이 헛되리라는 증거만을 찾고 또 찾는다.

마침내 또 다른 영상이, 보물 사냥꾼의 기억이 찾아든다.

 일리에 최고 자산가의 호화저택에 자리한 거울의 방, 그곳의 벽면을 가득 차지한 17개의 크고 작은 거울에 용의자들, 청년 탐정, 그리고 머리칼을 양 갈래로 땋아 내린 소녀의 모습이 갖가지 변형된 형태로 어른거린다. 탐정의 오른손이 얼굴께로 올라가자 그 손에 쥐어진 찻잔이 희미한 광택을 발한다.

 

  ‘에띠엔 양이 밝혔다시피, 이 잔에는 연인과 친구의 공모로 독살당한 여인의 원념이 서려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마셨던 액체는, 여러분도 익히 짐작하시겠지만 카타이 산 다질링이었죠.’

 

 탐정을 제외한 일동의 시선이 한 여자에게 집중된다. 그녀와 팔짱을 끼고 있는 사내가 고함친다.

 

  ‘잠깐 기다려! 염살(念殺)이라는 게 발동하려면 대상물, 촉매, 정령사의 간섭이 빠짐없이 필요하다고 했지? 내 명예를 걸고 말하는데 베라는 정령술 따윈 전혀 익힌 적이 없다고!

  ‘설명이 다소 부족했군요. 다른 두 요소가 완벽하게 갖춰지기만 한다면, 그저 정령사의 소질을 갖춘 일반인일지라도 얼마든지 염살을 발동시킬 수 있습니다.’

  ‘하! 애당초 그 소질이란 걸 가진 녀석이 우리들 중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배불뚝이 남성이 입을 벌린 채 비틀거리자 거울의 영상들이 뒤틀린다. 청년이 일일조수에게 찻잔을 건네주곤 용의자들을 향해 걸어가자 영상들이 하나 둘 반전한다. 탐정의 외눈 안경이 반짝인 순간 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오른다.

 

  ‘단 한 명뿐이지만, 여기 모인 자들 가운데 정령침투를 시전할 수 있는 인물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경악하는 사람들을 향해 오른손을 천천히 치켜들며 청년 탐정이 소리친다.

 

  ‘우리들 가운데 유일하게 염을 일깨울 수 있는 자, 달리 말하자면 이번 연속살인사건의 범인은- 당신이야!!’

 

 

 

 ‘동전’에겐 시덥잖은 추리극의 결말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궁지에 몰려있는 건 인간들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걸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깨달음은 몹시도 뒤늦은 감이 있었다.

 악령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정령사의 의지를 담고 있는 물의 정령이 요동치는 수면을 통과했다.

    콰르르르르르릉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이 수면 가득 왕관 모양의 거대한 물줄기가 튀어 오른 순간, 물의 정령이 우물 바닥 정중앙의 벽돌과 충돌했다.

 그렇게 정령사의 호소를 전해 듣고 어렴풋이 눈을 뜬 염은,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물의 기운을 느끼자마자 자신의 기원을 떠올리곤 안식처를 박차 올랐다.

     드드드드드드드드

 단 하나의 벽돌에서 시작된 눈부신 백광이 도미노가 무너지듯이 주변의 벽돌들을 좌르륵 물들이며 바닥 전체를 뒤덮더니 더욱 더 무시무시한 기세로 벽을 타고 번져나갔고, 그 빛으로부터 생겨난 희미한 연기들이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정령의 오브에 하나 둘 스며들어 맹금류마냥 억세 보이는 날개가 달린 정령으로 변하더니 목표물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했다.

 

  벌레 놈들이 감히-!!

 

 ‘동전’이 분노어린 외침을 미처 완성하기도 전에, 눈부신 빛줄기와 백익의 무리들이 악령의 전신을 덮쳤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악령의 주둥이에서 쇳소리를 닮은 절규가 터져 나왔다. 빛줄기에 직격당한 동공이 울룩불룩 부풀어 올랐고, 전신을 내달리고 있는 혈관들이 파열되며 뿜어져 나온 검붉은 액체는 순식간에 기화됐다. 거체를 가리고 있던 자색 안개는 이미 흔적조차 없었다. 까마득한 시간동안 수많은 피식자들의 피와 살과 공포를 양분삼아 부풀려 온 육체는 아직 강대했으나, 실체가 까발려진 악은 더 이상 진정한 공포로 군림할 수 없는 법. 하물며 그 실체마저도 정화의 빛에 녹아내리고 수백 정령들의 날카로운 부리에 찢겨나가고 있음에야.

   퍼엉 퍼엉

 ‘동전’은 대가리를 내달리는 새로운 통각에 몸부림치면서도 전방을 향해 초점을 맞췄다. 뿌연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백색 정령들을 그대로 통과하곤 자신의 몸을 갈기갈기 헤집어놓는 총알비였고, 백익들이 한데 엮여 만들어진 둥지에 각기 몸을 파묻은 채 탄환들을 연신 쏟아내고 있는 두 사수들의 모습이 바로 뒤따랐다.

 단박에 정화가 성공하지 못한 걸 보면 우물에 담겨있던 염이 부족했던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동전’은 이 위기를 수월하게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을 떠올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소환자 몬토로와 맺은 계약에 따라, 애당초 악령에겐 이 세계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 있었다.

 하지만 인간 따위에게 거듭 굴욕을 당한 것도 모자라 제 발로 도망친다는 건, 악령에겐 존재 자체를 인정할 수 없는 선택지였다.

 

  시건방진 벌레 놈들!! 여기서 소멸되는 한이 있더라도 네 놈들을 산산조각내고 말겠다!!!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정령사를 제외한 나머지 인간들이 하이 소프라노로 절규한 순간, ‘동전’은 몸뚱이를 구성하고 있던 원소들을 대가리 쪽으로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체적이 갑작스레 줄어들어 길쭉해지자 전신의 붕괴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지만, 생사를 초월한 악령에게 그딴 건 이미 관심 밖의 문제.

 꼬랑지부터 빛을 내며 부서지기 시작해 그야말로 심지에 불이 붙은 폭탄 같은 몰골이 되어버린 ‘동전’은, 수백 가닥의 촉수들을 생성해 주위의 백색 정령들을 견제하는 동시에 양 볼을 잔뜩 부풀리며 주변의 대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이잉

 꽉 오무린 주둥이의 틈새에서 새어나오는 날카로운 소음과 검붉은 연기. 사울이 뜨악한 목소리로 외쳤다.

 

  "설마 브레스냐?!!"

  “바퀴벌레 같은 놈! 작작 좀 하라구!”

      퍼엉     퍼엉

 그레이스의 일갈과 함께 날아간 ‘크레이모어’가 악령의 오른쪽 볼에 구멍들을 잔뜩 뚫어놓자 그곳들로부터 가느다란 연기가 뿜어져 나왔지만, ‘동전’은 잠시 멈칫했을 뿐 금세 구멍을 메워내고는 기세를 더욱 올렸다.

 녀석의 몸뚱이는 아직도 절반 이상 남아있었고 백익의 정령들은 요동치는 촉수들을 억제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듯 했다. 바로 그 때, 꼼짝없이 동반 사망할 위기에서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머리를 굴리던 브루니가 머릿속에 번뜩인 착상을 그대로 입에 담았다.

 

  “사울!! 무기! 무기를 떠올려요!!”

  “뭣??"“무기?”

  “저 녀석을 박살낼 강력한 무기를 원한다고 집요하게 생각하라고요! 빨리 빨리!”

 

 악령은 그 말을 듣고서야 상대의 의도를 깨달았다. 원체 정령은 화약과 상성이 좋지 못하다. 게다가 백익의 정령들 대다수의 모체가 된 건 총이라곤 구경조차 못했을 원주민들의 염. 자신에게 익숙지 않은 무기를 쥐어줬을 때 본래의 힘을 내지 못하는 건 인간이나 정령이나 매한가지이니, 두 사수가 쏟아내던 탄환에 담긴 힘은 정령들이 본래 실어줄 수 있는 그것에 비하면 한참이나 적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만약-

 

  “헉!”“꺄악!”

 

 둥지들이 갑작스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통에 네 남녀는 다시금 허공에 내던져졌다. 하지만 막상 추락한 건 세 여자뿐이었다. 예의 정령들이 사울의 다리 주위에 잔뜩 몰려들더니 악령과 수평을 이룬 채로 교각마냥 길쭉하니 변해갔던 것이다.

 정령무리에 발목까지 파묻힌 채 거꾸로 매달려있던 사울이 하체와 허리에 힘을 주며 천천히 몸을 곧추세우자, 그의 등 뒤에 가려진 채로 희미한 빛을 발하던 물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끄트머리에 몰려드는 정령들에 의해 점점 길쭉해지고 있는 그 반투명 물체는, 전갈의 앞발을 닮은 날카로운 머리를 지닌 자벨린이었다.

 

  “저 녀석 약점동전일 테니까 거길...”

  “알았어요! 사격술을 배운 이후론 투창을 써본 적이 전혀 없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죠!”

  “싫어어어어어어어어-!!”

  “.........”

 

 세 여자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며 수면을 향해 멀어져가는 동안, 사울은 양발을 차례차례 바닥에서 빼내며 도움닫기를 하기 시작했다. 차츰 가속을 붙이며 성큼성큼 자신에게 가까워오던 인간이 자신을 향해 올곧게 시선을 맞춘 순간, ‘동전’은 절감했다. 사울 카다프의 말에 일체의 거짓이 없다는 것과는 별개로, 녀석의 눈동자에는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자신감이 가득했다.

 

  웃기지 마! 인간은 절대로 날 이길 수 없어!!

 

 자신이 상대방의 근거 없는 믿음에 압도당하고 있음을 깨닫자마자, 악령은 분노어린 염을 발하며 주둥이를 한껏 개방했다.

 사울이 어깨 위로 투창을 치켜들며 허리를 오른쪽으로 한껏 돌렸다. 청년이 지나온 바닥이 본래의 형태로 되돌아간다.

 

  “진심으로 지키고 싶은 게 있는 인간은-

 

 청년의 손을 떠난 투창을 백익의 정령들이 뒤따랐다. 악령에게서 뿜어져 나온 악의어린 숨결과 점점 빛을 더해가는 유성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너 따위에게 지지 않는다고!!”

 

  콰아아아아아앙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눈부신 빛이 몰아닥치자 ‘동전’은 눈을 감았으며, 무언가가 본체를 산산 조각내며 이마 깊숙이 박혀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고요해졌다.

by 닉네임 | 2009/07/29 08:57 | 팬픽 중편 | 트랙백 | 덧글(0)

노인은 동전을 원한다 (8)

통로에는 한동안 아무 것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어둠만이 가득했다.

  드드드드-

 이윽고 고요함을 깨며 낮은 땅울림 소리가 어둠에 섞여들더니 황금색 불빛이 검은 장막의 한 가운데에 작은 구멍

을 냈다. 진동음이 커져감과 동시에 빛줄기가 점점 크기를 더해가며 주위의 어둠을 잠시 몰아냈다. 하지만 빛에

휩싸인 채 나타나 사방에 촉수들을 꽂아대던 괴물이 금세 사라지자, 그 자리에는 이전보다 더더욱 짙은 어둠이 내

려앉을 뿐이었다.

         드드드드드드-

 진동음을 뚫고 짐승들의 울부짖음이 어렴풋이 들려올 즈음, 빛의 정령 ‘윌-오-위스프’가 청광으로 다시금 통로를

밝히곤 괴물의 촉수자국이 남아 있는 통로를 순식간에 지나쳤다. 당연하게도 녀석은 스스로 자연계에 등장한 것

이 아니었으니, 윌-오-위스프를 소환한 워록과 그녀의 동료들이 정령의 가루가 흩날리고 있는 공간으로 부리나케

달려들고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제대로 달리고 있는 건 선두의 보물 사냥꾼과 바로 뒤의, 어깨에 산탄총을 둘러 맨 전사

뿐이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계속된 전력질주로 지쳐버려서 전사에게 각각 한손씩을 내맡긴 채 힘겨운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드드드드드드

 네 사람이 휘젓고 간 어지러운 대기를 타고 솟구쳤다가 막 가라앉으려던 빛 가루들이 진동음에 맞춰 다시금 어지

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수백수천의 시뻘건 눈알로 이뤄진 해일이, 허기를 달래줄 먹잇감을 쫓

고 있는 쥐떼들이 가냘픈 빛무리를 단숨에 집어 삼켰다.

 

  “아아아아악~이건 아니야!! 브루니 씨! 어떻게 좀 해봐요!"

 

 사울은 지나쳐온 통로에 뚫려있는 샛길들, 그리고 서른 발자국 즈음 뒤까지 바짝 다가온 쥐떼들을 연신 뒤돌아보

며 소리쳤다. 하지만 브루니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다.

 기진맥진한 인간들 따윈 얼마든지 따돌릴 수 있을 텐데도 조롱하듯 앞에서 알짱대는 ‘동전’을 멍하니 따라가는 건

물론 바보짓이다. 하지만 녀석의 계략을 피하겠다고 무턱대고 샛길로 달아나는 것도 현명한 행동은 못 된다. 뒤늦

게 깨달았지만, 녀석이 지하 2층에서 끈끈이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었던 건 일행의 머릿속에서 갖가지 기억들을

그때그때 읽어냈기 때문일 터. 다른 이들은 어땠는가와 상관없이, 브루니 본인부터가 녀석의 정체를 깨닫기 전까

지 몇 번이고 '제대로 된 지도만 있었으면 저 놈을 앞지를 수 있을 텐데'라거나 '이렇게 깊이 들어갈 줄 알았다면

어떻게든 귀환서를 지급받았어야 했다'라는 따위의 불평을 했었다.

 즉, 녀석은 놀잇감들이 유적의 지리를 정확히 모르는데다 오직 도보로만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무리라는 거 알잖아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진짜 어른이라구요!"

 

 그러니 어쩌겠는가. 하나뿐인 출구를 막아선 채 여기저기 진을 치고 있을 쥐떼들과 마주치려고 헛되이 헤매느니, 손에 쥔 지도들이라도 뒤적이며 얌전히 기회를 노릴 수밖에.

 

  “받아들이긴 뭘 받아들이란 말입니깟! 이따위 물고문 감옥에서 얌전히 쥐밥이 되는 건 절대로 싫다구요!”

 

...하지만 사울은 그녀와 견해가 사뭇 다른 듯하다.

 

  "악쓸 기운이 있으면 열심히 다리나.....앗!?"

 

 울컥해서 핀잔을 주려던 브루니는 다음 순간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거다! 정령 침투(elemental penetration)!"

 

 브루니는 -비록 바보 청년 본인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사울 덕분에 떠오른 아이디어의 성공 가능성을 재빨

리 가늠해봤다. 그리고는 결론을 그대로 따라-

    콱

-요란스런 구둣발 소리를 내며 반대쪽으로 몸을 되돌렸다.

 

  “헉?!”

 

 사울은 서너 걸음 앞의 안내자가 급정거하자 동료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손을 차마 풀지 못한 채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브루니는 눈웃음까지 지어보이며 여유롭게 사울을 비껴 지나곤, 왼편에서 청년을 뒤따르

던 정령사의 남은 손을 낚아채며 그대로 내달렸다.

 양쪽에서 잡아당겨져 비틀대던 베아트리체는 사울이 어쩔 수 없이 손을 놓자마자 쥐떼들을 향해 속절없이 끌려

갔다. 항의할 여력이 없는 그녀를 대신해서 청년이 외친다.

 

  “갑자기 무슨 짓입니까!”

 

 브루니 나름대로는 각층을 관통하는 지지구조로 인한 공통된 통로의 위치, 이동 도중 적과 조우할 경우 선택 가

능한 '목적지들'의 수, 그리고 트레저 헌터로서의 감 따위를 종합한 결과 뒷길을 택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을 가타부타 설명하는 대신 청년이 절실히 원하고 있을 대답만을 내뱉었다.

 

  “변태 쥐한테 한 방 먹여 주고 싶은 거죠?! 그럼 잔말 말고 따라와요!!”

 

물론 사울은 그 말 한마디에 단박에 설득 당했다. 그는 방금 전과는 사뭇 다른 감정이 담겨있는 외마디 소리를 내

지르곤,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그레이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웩..토할 거 같애..”

  "......."

 

 하지만 가슴 벅찬 희망을 나누어야 할 전직 정보장교 씨는 허리를 꺾은 채, 자신이 몹쓸 체력의 소유자임을 솔직

담백하게 고백하고 있었다. 사울은 명색이 대 브리스티아 군의 정예였던 처자가 어째서 정령사도 울고 갈 만치 허

약한지 진지하게 따지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촉박했다.

 

  “사울!! 꾸물거리-

                    드드드드드드

앞선 일행들이 저만치 통로의 우측 샛길 안으로 절반쯤 몸을 넣은 채 입을 벙긋거리고 있었지만, 어느새 정령의

빛이 미치는 곳까지 다가온 쥐떼들의 굉음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레이스 씨! 근성! 근성으로 버텨 봐요!"

 

 사울이 끌로드스런(?) 발언과 함께 그녀를 잡아끌자, 그레이스는 얼굴가득 복잡미묘한 표정을 띄우면서도 다시

금 청년과 보조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퍽 우드드드득

 두 남녀는 힘껏 뛰었다. 벽과 동족들 사이에 끼인 녀석들이 으스러져 나가는 광경이 점점 또렷해질수록, 밀려드

는 공기 역시 비릿한 악취 덩어리로 변해갔다.

 사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샛길까지 남은 거리는 열댓 걸음. 하지만 쥐떼 역시 그만큼 가깝다.

  브루니가 손을 휘저으며 두 사람을 재촉하고 베아트리체가 녀석들을 향해 돌아선다.

 

  “으아아아아아!”

 

 사울이 악을 지르며 무릎이 꺾어져라 가속한 순간, 정령사의 손끝에서 얼음의 정령들이 뛰쳐나왔다. 바닥을 빙판

으로 바꿔나가며 퍼져나간 서리 구름은 쇄도해오는 군세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지만, 그 대열을 뒤흔들어 놓기

엔 충분했다.

  kieeeeeeeeeeeek

빙판을 밟고 미끄러진 쥐떼들이 위쪽의 무리와 요란스레 뒤엉켰다.

       "꺅!"

한계치를 넘어 움직이던 전직 정보장교의 두 다리도 요란스레 뒤엉켰다.

   콰드드드드득

뒤따르던 녀석들까지 가세해 이리저리 엉클어진 쥐더미가 눈발이 휘날리는 대기를 밀어내며 눈덩이마냥 부풀어

오르는 동안-

   "큭!!"

-반사적으로 몸을 낮춰 그레이스를 옆구리에 꿰찬 사울은 남은 손까지 총동원해 필사적으로 땅을 밀쳤다.

남은 거리는 다섯 걸음. 한때는 생명체였던 얼음덩어리들이 움찔거리는 회백색 방벽으로부터 튀어나와 청년의 발

치까지 날아든다.

 

  "서둘러요!"

 

 브루니의 손이 사울의 어깨에 닿은 것과 살아있는 장벽을 집어삼키며 붉은 물결이 밀려온 건 거의 동시였다. 그

레이스의 두 발이 다시금 땅에 닿자마자, 네 사람은 부리나케 샛길로 뛰어들었다.

    콰르르르르릉

 쥐떼들이 샛길입구를 지나치는 광경이 보였던 건 찰나의 순간이었을 뿐, 굉음과 함께 사각의 공간에 어둠이 차오

른다 싶더니 어느새 사울 일행의 서른 걸음 뒤에는 위세를 조금도 잃지 않은 설치류 무리가 꽉 들어차 있었다. 아

니, 이제는 뒤쪽만이 아니라 녀석들과 비스름한 거리의 앞쪽에도 갑작스런 굉음과 함께 붉은 빛이 일렁이기 시작

했다.

 

  “젠장!”

 

 사울이 새로이 출현한 적들을 노려보며 뭐라 입을 달짝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눈동자를 바삐 움직여 전방의 샛길

들을 살펴보던 브루니의 외침에 묻혔다.

 

  "베아트리체 양! 라템 추기경의 묘에 옷감을 바쳤을 때 생겼던 일, 기억하죠?"

 

당시 일행이 아니었던 그레이스는 물론이고 석관에 직접 앙 선생의 옷감을 내려놓았던 사울마저도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정령사 양만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아!"

  "아? 뭐야, 뭡니까 대체?! 둘이서만 멋대로 납득하지 말라고요!"

 

 베아트리체는 사울의 뜨악한 목소리에 응답하는 대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른손으로 허공을 휘저었고, 그녀의

소환에 응한 물의 정령이 사라져가는 빛의 정령을 대신해 일행을 인도했다.

   kiiiikiiiiiiiiki

 

  "빨리 빨리!"

 

 돌아온 건 내용 없는 재촉이었지만 앞쪽 녀석들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져오는데도 여유를 부릴 수야 없다. 일행은

너나 할 것 없이 숨을 한껏 들이마시며 발을 놀렸다.

 정령이 발하는 빛이 한결 흐릿해져 시야가 좁아지자, 앞뒤에서 들려오는 적의에 찬 굉음이 더더욱 위협적으로 느

껴진다.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두 남녀는 물론이고 목적지의 대략적인 위치를 알고 있는 이들마저

도 가슴을 졸이며 내달렸다.

  물의 정령은 인간들의 심정이야 어떠하든 한결같은 속도로 통로를 직진했다.

앞뒤에서 다가오는 쥐떼들 역시 그러했다. 정령이 쥐떼들의 열댓 걸음 앞에 이르러 통로 왼편의 샛길로 진로를 틀

었을 때도, 통로 앞뒤의 쥐떼들은 한결같았다. 심지어 사냥감들이 무시무시한 가속으로 통로에서 모습을 감추었

을 때조차도 말이다.

 콰앙

    우드드득

 단지 같은 먹잇감을 쫓다보니 한데 모이게 된 것뿐인 쥐들에게 양보의 미덕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녀석들은 자

신의 앞을 막아서는 경쟁자들과 날카로운 발톱을 맞부딪치고, 꼬리를 흔들어대며 미적거리는 경쟁자들에게 시퍼

런 이빨을 박아 넣었다. 그렇게 통로 전체가 핏빛으로 물들어갈 즈음...

    kikikikikikikikik

 맞부딪친 두 무리들 중 어느 한 쪽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될 듯한 굉음 속으로, 또 하나의 악의어린 소리가 섞여들기 시작했다.

 

 

 

  “으아압!!”

 

 사울은 산탄총을 주인에게 던져주곤, 난장판이 벌어지기 직전 샛길로 빠져드는데 성공했던 녀석들을 향해 달려

갔다. 그가 저만치 뒤쳐져서 하나 둘 녀석들을 처리하는 동안 세 여자는 통로를 완주하고 그 끝에 놓인 세 갈래 길

중 왼쪽을 택해 계속 전진했다.

 

  “헉....헉...”

 

 브루니는 새 길에 들어서자마자 정령마저 제쳐버릴 듯이 거침없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무아지경으로 뒤

따르던 두 여자는 귓속을 먹먹하게 두드려대던 소음이 뚝 그치고 서로의 숨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주위가 고요해

지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눈썹을 찌푸렸다. 두 사람의 불쾌한 예감을 사실로 바꿔준 건 희미한 조명을 받으며 입

구에 모습을 드러낸 사울이었다. 그는 피땀에 젖어 김이 피어오르는 어깨를 벽에 기댄 채로 가쁜 목소리를 냈다.

 

  “아직 멀었습니까?! 녀석이..."

 

  어딜 가는 거지? 너희들은 내 각본대로만 움직이면 돼. 즉흥연기 따윈 필요 없다고.

 

  “후, 흐허허허허...”

 

 하지만 사울의 귀에 들려온 건 동료의 응답이 아니라 예의 굉음, 그리고 굉음을 압도하며 점점 커져오는 고함이

었기에, 그는 황금빛이 비쳐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살 떨리는 광경을 확인하는 대신 열심히 줄행랑쳤다.

 사울이 대열 맨 뒤쪽의, 그레이스를 따라잡았을 즈음, 지금까지의 입구들에 비해 눈에 띄게 큼직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아치형 입구가 정령의 빛을 받아 희끄무레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물의 정령은 바로 그 입구 앞에서 전진

을 멈추곤 주위를 선회하기 시작했다.

 

  “좋아!”

 

 브루니의 득의양양한 외침, 그리고 걸음을 내딛을수록 서늘해지는 대기 덕택에 사울과 그레이스는 자신들이 마

침내 목적지에 근접했음을 깨달았다. 아니, 그들은 뒤이어 더더욱 중요한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정신없이 휘

둘리는 통에 잊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애당초 반나절 전, 그러니까 브루니에게 식-카르챠의 건설 목적을 들었을

때부터 이 유적에서 ‘물의 정령이 향할 만한 장소’가 어디인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네 사람은 마침내 수로의 끝에 멈춰 섰다.

 정령이 소환자의 움직임에 맞춰 천천히 전진하며 입구 안쪽의 어둠을 걷어나가자, 이 땅의 원주민들이 그네들의

믿음에 따라 죄인들을 정화의 순간까지 가둬두곤 했다는 '우물'이 그 모습을 어렴풋이 드러냈다.

 저 반대편에서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들이 물의 정령에 반응해 실핏줄마냥 복잡스런 선을 그려내고, 그 아

래, 이쪽과 대칭되는 수로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에선 물의 정령들이 하나 둘 빠져나와 낯선 동료를 향해 유유

히 다가간다.

 이 모든 것들이 세레스테 호수의 물구덩이와 견줘도 폭이 두 배는 될 듯한 거대한 원주의 일부를 장막삼아 그림

자극을 벌이는 광경은 퍽 아름다웠지만, 네 사람에겐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이 순간 그들에게 중요한 건 단 두 가지였다. 자신들이 끝이 어디인지도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앞에 서 있다

는 것.

  드드드드드드

 그리고 반대쪽의 유일한 출구엔 이미 변태 쥐와 그 일당들이 그득하다는 것.

 

   막다른 길이로군. 자 이젠 어쩔 셈이지?

 

 쥐떼들의 선두에서 빛을 발하고 있던 ‘동전’이 경멸어린 목소리를 내며 속도를 더하자, 녀석들이 만들어낸 기류가

목덜미에 느껴질 만치 서로의 거리가 좁혀졌다.

   kieeeeeeeeeeeek

 수로의 끄트머리까지 스무 걸음 즈음을 남겨두고 쥐떼들이 일제히 울부짖자, 거기에 질세라 브루니도 힘껏 소리

쳤다.

 

  “시간관계상 요점만 말할게요! 우리, 지금부터 뛰어내릴 거예요!”

  “아르스 모리엔디.” “그래서 추락 다음엔 뭡니까? 붕괴? 폭파?”

 

 부루니는 일행들의 체념어린 반응에 상큼한 목소리로 즉답했다.

 

 "'다음'은 없어요.“

 “뭐,뭐라고요?”

  “정령사 양이 주문을 욀 때까지 우리들이 엄호만 제대로 한다면 바닥에 닿기 전에 ‘살든 죽든’ 결판이 날 거에요.

자, 몸빵 씨는 베아트리체 양하고 먼저 뛰어내려요. 어서!”

 

 브루니는 엄청나게 축약된 설명을 마치자마자 사울에게 베아트리체의 손을 건네곤 두 사람을 벼랑 쪽으로 떠밀

기 시작했다. 담담한 표정으로 걸음을 내딛는 베아트리체와 달리 사울의 얼굴은 흙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몸을 돌

려 브루니에게 저항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살든 죽든’이라니?! 잠깐, 잠깐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순간 브루니의 눈가에 보일 듯 말 듯한 웃음기가 떠올랐다.

 

  “아아, 행운의 부적이라도 필요한 거예요? 그렇다면-”

 

브루니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울의 목덜미에 두 팔을 두르며 뒤꿈치를 들어올렸다.

 

  “아?!!”

 

 외마디 소리를 내며 굳어버린 세 남녀. 그들 중 둘이 브루니에게 떠밀려 어둠속으로 맥없이 떨어져 내리자, 남은

한 명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도둑고양이(?)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다, 당신!! 이 와중에 무슨 파렴치한 짓을-!!"

                                        드드드드드드

 

 지척까지 다가온 쥐떼들의 굉음이 공동에 가득 찼다. 브루니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몇 마디 말하고는 어둠

속으로 부리나케 뛰어내렸고, 그레이스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함을 지르며 그녀를 뒤쫓았다.

‘동전’이 쥐떼들을 재촉하며 허공으로 몸을 던진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미처 주인을 뒤따르지 못한 정령의 윤곽이 순식간에 멀어져가고 어둠이 사방을 에워싼다. 귓가에 들리는 건 쥐떼

들의 굉음과 매서운 바람소리 뿐. 전신을 훑고 지나는 칼바람이 점점 속도를 더하자 심장의 불규칙한 박동도 한계

를 향해 치달린다.

 

 

  “큭-!”

 

 사울은 풍압에 떨어져 나가려는 베아트리체를 간신히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는 반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

쌌다. 청년의 등에 두 팔을 두르며 베아트리체가 물었다.

 

  “카다프 씨, 두려워요?”

  “.......”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답은 자명하지만, 함께 고난을 겪고 있는 아리따운 처자에게서 이런 유의 질문을 받으면 없던 용기도 용솟음치는 것이 사내들의 서글픈 속성이 아니던가.

 게다가 사울 카다프가 '실컷 얌전을 떨다가도 일단 난장판에 휘말리면 누구 못잖게 막 나가는' 삐뚤어진 녀석이라는 건 오직 본인만 부정하는, 순도 100%의 진실이다.

  그렇기에 사울의 목소리에는 공포심 이상의 묘한 열의가 담겨 있었다.

 

 “...훗, 여기까지 와서 뭘 더 두려워하겠습니까! 오히려 당신이 무슨 수로 변태 쥐를 혼내줄지 잔뜩 기대하고 있습니닷!”

 

 그 말에 베아트리체가 미소를 지은 순간 그녀의 뒤쪽, 굉음의 진원지로부터 요란스런 총성이 울려 퍼졌다. 사울

은 정면 저 너머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포화에 어렴풋이 드러난 두 사수들의 윤곽 너머, 본래는 온전히 어둠에 잠겨 있어야 할 허공으로부터 쥐떼들이 폭우를 연상케 할 정도로 빽빽하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들의 선두에는 총탄에 맞아 너덜거리면서도 전혀 위세를 잃지 않은 ‘동전’이 사이한 빛을 뿜고 있었다.

 

   설마 진짜로 뛰어내리다니 참으로 비정상적인 개체들이로군.

 

쥐떼들의 비명에도 불구하고 ‘동전’의 목소리는 머릿속까지 또렷하게 전달됐다.

 

 

 하지만 아무리 몸부림쳐봐야 너희 또한 게서 결코 벗어날 수 없어. 왜냐하면 는 너희 필멸자가 스스로의 욕망에 얼마나 충실한지, 그리고 그 중에서 으뜸가는 욕망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거든.

 

 ‘동전’이 뿜어내는 빛살이 점점 어두운 색조로 변해갔다. 주변의 쥐떼들이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부풀어 오르더

니 하나 둘 파열했고, 녀석들의 육편은 보이지 않는 그물에라도 걸린 것처럼 허공에서 꿈틀대다 ‘동전’의 주위에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우물의 가장자리에 닿을 듯 말듯 부풀어 오른 고깃덩이에서 갑작스레 시뻘건 핏줄들이 치

달리더니 폭발적으로 박동하기 시작한다.

   kieeeeeeeeeeek

마지막 무리의 단말마가 사그라진 순간, ‘동전’의 거대한 몸뚱이로부터 증기인지 안개인지 모를 자색의 기체가 뿜

어져 나왔다. 거대한 촉수들, 그리고 종을 알 수 없는 수백 가지 생명체들의 일부분이 어른거리는 안개를 뚫고, 거

의 리볼도외 종탑과 맞먹는 크기의 쥐 대가리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네 사람이 눈앞의 광경에 넋을 잃은 채 추락하는 동안, 이윽고 그 거대한 이마에 자리 잡은 광구로부터 조소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직도 시덥잖은 각오가 남아있나? 날 물리치고 지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성 싶은가?

   물론 아니겠지.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그래도 살고 싶겠지. 무슨 수를 써서든 살고 싶을 거야.

   그렇다면 괜한 짓거리는 그만두고 차라리 날 만족시키려고 노력하는 게 어떨까?

다행스럽게도 난 아직 굶주려 있어.

좀 더, 좀 더 극적인 결말을 원한단 말이다!

자, 동족들을 전부 쳐 죽이고 날 에우셰비오에게 데려다 줄 인간은 누구냐?

 평생토록 날 증오하고 스스로를 경멸하면서도

   결국엔 살아있어서 다행이라고 기뻐할 인간은 누구냐!

 

 

  “쪼잘쪼잘 시끄럽네!”“이거나 쳐 드세요!”

 

 두 사수의 화기가 다시금 불을 뿜었지만, 녀석은 대가리에 총탄을 가득 받아내고도 여전히 여유로웠다.

 

  얼빠진 위선자 둘은 제외해야겠군. 어디, 나머지 둘은 어떨까?

 

 자신의 제안이 거부되리라는 일말의 의혹조차도 느껴지지 않는, 확신과 악의가 가득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하

지만 사울은 몸을 반전시켜 베아트리체를 아래쪽에 두기 위해 손을 휘저었을 뿐, 그저 침묵했다.

청년은 정령사 양이 자신의 몫까지 더해서 녀석에게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한 대답을 날려 주리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이계의 악령이여!”

 

 최고의 기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를 앞에 둔 채로, 베아트리체가 소리쳤다.

 

  “인간의 의지가 진정 나약하기만 한 것인지, 지금부터 제대로 경험해 보시길!”

 

 정령사의 맑은 음성이 메아리치자, 대기에 충만한 에테르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by 닉네임 | 2009/07/02 10:23 | 팬픽 중편 | 트랙백 | 덧글(0)

노인은 동전을 원한다 (7)

벌거숭이 꼴로 악취가 가득한 어둠속에 던져진 이래로, 오늘처럼 주둥이에서 꼬리 끝까지 주체할 수 없는 활력이 가득 찼던 때가 있었던가.

 다른 녀석들에게 뒤질세라 내달리던 ‘쥐’는 갑작스레 떠오른 의문에 답하려다 금세 포기했다. 한동안 가라앉았던 공복감이 또다시 몰려오고 있었다.

    kikikikikiki

 참다못해 새나온 비명이 영문 모를 괴성으로 변한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배가 고프다. 미칠 듯이 배가 고프다. 지금 이 순간 느끼고 있는 갈망에 비하면 처음으로 '그 빛'을 쪼였을 때 느꼈던 고통 따윈, 곁에 있던 녀석들과 채 눈을 뜨지 못한 새끼들까지 전부 씹어 삼키고 나서야 벗어날 수 있었던 굶주림 따윈 장난에 불과하다.

 막다른 곳을 피하려는지 오른쪽으로 선회하는 선두 녀석들의 먹음직스런 냄새에 코를 벌름거리며, ‘쥐’는 주둥이에 고인 침을 삼켰다.

    kikikikikiki

 털이 스칠 정도로 바짝 붙어있는 녀석들이 나도 똑같은 처지라는 듯 일제히 악을 써댔다. 바로 그 순간, ‘쥐’는 퍼뜩 깨달았다.

 굶주림을 견디느니 동족을 잡아먹는 쪽을 택할 우리들이 어딘가를 향해 함께 달리고 있다니,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들은 어째서 인내하고 있을까......나는 어째서 인내하고 있을까?

 

   그건 저 너머에 최고의 먹잇감이 있어서야.

 

 머릿속에서 들려온 뜬금없는 해답에, ‘쥐’는 코털을 바르르 떨며 눈을 깜빡였다.

   나는 지금 최고의 먹잇감을 쫓고 있어.

.......내가? 사냥을?......그랬던가?

 

 ‘쥐’는 그저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을 뿐이지만, 사실 돌연변이도 뭣도 아닌 '쥐'가 지각이 전혀 미치지 않는 곳의 무언가를 줄기차게 쫓는 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쥐라는 종의 기억력의 한계는 기껏해야 3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지금으로부터 108분 이전에 벌어졌던 동족살해의 기억이란 쥐의 세계에선 존재할 수도, 존재해서도 안 돼는 부조리다.

 그러나 일생동안 3분의 세계들을 반복해왔을 뿐인 '쥐'가 그 세계를 가뿐히 초월하는 존재의 악의에 무슨 수로 저항할 수 있단 말인가.

 또 다시 강렬한 허기가 찾아오자, '쥐'는 마지막 기회를 깨끗이 포기하고 본능에 몸을 맡겼다. 고양이를 피해 쥐구멍 안으로 도망쳐왔다가 그 사실을 잊고 금세 밖으로 나가곤 했던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kikikikikiki

 '쥐'의 괴성이 신호라도 된 양, 저 앞쪽의 어둠에서 황금색 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 빛이야말로 쥐구멍 앞에서 먹잇감을 기다리는 고양이 따위완 비교조차 불가능할 만치 부지런하고 잔혹한, 끝내 '쥐'를 집어삼키고 말 포식자의 안광이었다.

.

.

.

 벌거숭이 꼴로 악취가 가득한 어둠속에 던져진 이래로, 오늘처럼 주둥이에서 꼬리 끝까지 주체할 수 없는 활력이 가득 찼던 때가 있었던가.

 다른 녀석들에게 뒤질세라 내달리던 쥐들은 이미 서른여덟 번이나 반복한 각본을 다시 한 번 읊어댔다. '동전'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삼류 배우들의 진부한 방백을 참아내느라 쌓이고 쌓인 분노가 시키는 대로, 녀석들의 머릿속에 지금까지보다 한층 더한 갈망을 쏟아 부었다.

 

 배가 고프다. 미칠 듯이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프다. 미칠 듯이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프다. 미칠 듯이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프다. 미칠 듯이 배가 고프다....................

 

 수백 마리의 쥐들이 오직 '동전'만이 들을 수 있는 비명을 질러댄다. 온갖 어두운 감정이 가득 배어있는 외침, 외침.........

 머릿속에 직접 들이붓는다면 제아무리 강건한 생명체라도 단박에 미치게 할 염파를 한껏 들이키며, '동전'은 요란스레 이빨을 부딪쳤다. 쥐떼들이 거듭된 고통에 익숙해져 약한 염파를 발산하지 않도록 ‘고통의 시작점’을 설정해놓은 것까진 좋았지만, 그 결과 녀석들의 상념마저도 전부 판박이가 되고 말았다. 이건 계획했던 바가 아니었다. 고깃덩이 한 조각이면 금세 사라지고 말 하찮은 감정의 집합 따위로 어떻게 만족할 수 있겠는가.

 

  “ 파이어 볼!”

 

 억지로 쥐어짠 듯 갈라진 목소리가 공동에 울려 퍼지고, 어둠을 밝히며 날아든 불덩이가 '동전'과 왼쪽 벽을 잇고 있는 촉수 무더기 중 몇 가닥을 끊어내고는 바닥에 부딪쳤다.

   화르르륵

 너울거리는 불길 앞에 멈춰 선 '동전'은 촉수들을 벽에서 뽑아내 착지하고는 반대쪽을 향해 흐느적흐느적 몸을 돌렸다. 겉모습만 요란한 방해물 따위에 발이 묶여서가 아니라, 주연배우들의 선두경쟁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으아아아아압!!”

 

 네 남녀는 한데 뒤엉켜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베아트리체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던 브루니가 한발 앞서 간다 싶더니 어느새 사울이 어깨를 들이밀며 속도를 냈고, 청년이 팔을 휘저으며 내달리자 두 사수가 이를 악물고 그를 따라잡아 양쪽에서 팔꿈치를 찔러댄다. 물론 세 남녀가 아옹다옹하는 순간을 남은 한 명이 놓칠 리 없었지만, 드레스 자락을 나부끼며 난장판을 지나치던 워록은 그레이스가 내민 발에 걸려 사지를 쭉 뻗은 채 엎어졌다.

   kkkkkkkk

 구리조각을 깨문 모양새 그대로 차갑게 굳어버린 주둥이에서 웃음소리가 새나온다. 네 인간이 뿜어내는 강렬하고 다채로운 감정의 소용돌이야말로 ‘동전’이 오랫동안, 에우셰비오의 가방에 담겨 그의 영지를 떠나 온 이후로 줄곧 갈망해온 볼거리의 전조(前兆)였다.

 벌써 십여 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동전’은 초췌한 몰골의 기사가 월광에 의지해 영주관을 빠져나가는 광경은 물론이고 그날 밤 영지에서 벌어진 ‘술래잡기’를 지켜보며 느꼈던 감동까지도 세세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가슴에서 비어져 나온 칼날을 부여잡으며 남자가 내뱉던 노성은 강렬했다.

열심히 버둥거리며 딸의 팔뚝에 손톱자국을 남기던 노모의 흐릿한 눈동자에 새겨진 공포는 몹시도 감미로웠다.

 돌팔매질에 붉게 물든 머리를 누인 채 어린 살인자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부랑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표정은 못 견디게 아름다웠다.

 붉게 물든 보물을 한 손에 꽉 움켜쥔 채 동료를, 가족을, 연인을, 이웃을 찔러 죽이고, 쳐 죽이고, 태워 죽이고, 가둬 죽이며 남자가, 여자가, 아이가, 노인이 온몸 가득 내뱉던 끈적끈적한 광기...그것들이 영지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타고 저 높이 달까지 다다르는 광경을 음미하며 '동전'은 얼마나 아쉬워했던가.

 하지만 이윽고 술래잡기가 끝나고 희붐한 새벽이 찾아왔을 때, ‘동전’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여흥을 만끽할 수 있었다.

 폐허가 된 마을의 마지막 생존자가, 가장 뛰어난 술래였던 사내가 에우셰비오에게 등을 보인 채 소리치고 있었다. 검붉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소망을 줄곧 방해해 왔던 가족들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로 피범벅의 얼굴을 씻어내며 소리치고 있었다.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화내고, 울고, 웃고, 미치며 때로는 제 심장에 스스로 단검을 꽂아 넣기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그 날....‘동전’은 마침내 깨달았다.

 섬세하게 조율되어 있는 이성의 현이 끊어지는 소리야말로 그 어떤 단말마의 비명보다 흥미롭고, 자기혐오에 빠진 인간이 제 손으로 숨통을 끊는 광경이야말로 그 어떤 학살극보다 감동적이며, 그 순간 인간이 내뱉는 감정의 격랑이야말로 자신에게 최고의 포만감을 선사하는 양식임을....

 

  " 에이이익!!"

  " 꺅!!"

 

 '동전'은 고함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울 카다프가 그레이스 베르넬리의 뒷덜미를 잡아 그녀를 내동댕이치고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스퍼트하고 있었다. 청년의 머리 위에서 일렁이는 염파를 한껏 빨아들인 후, '동전'은 쥐떼들에게 보내던 암시를 단숨에 끊었다. 먹잇감을 쫓고 있다는 기억을 잊자마자 녀석들은 골육상잔을 벌이게 되겠지만, 애당초 인간들의 심신을 갉아내기 위해 모아들였던 소모품 따윈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

'동전'은 숙주를 바닥에 철퍼덕 뉘었다. 그리고 브루니의 외투 주머니에 담겨있는 '분신'을 향해 더 많은 사념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죽어있던 감각이 돌아올수록, 갖가지 상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먹잇감들의 외침이 점점 더 또렷해진다.

.

.

.

.

 브루니 에띠엔의 사탕발림을 믿고 보물 탐색에 나선 날치고, 단 한 번이라도 악화일로의 전개를 겪지 않은 날이 있었던가.

 마침내, 마침내 멈춰 선 ‘보물’을 향해 내달리던 사울은 갑작스레 떠오른 의문에 즉답했다.

       결단코, 명확히, 확실히 그런 날은 없었다.

 엔티크 가구를 구하려고 세 자매 호수의 유령 저택을 탐사하다가 끝내 퀭한 눈초리의 마리오네트들에게 둘러싸인 채 자동방위 뭐시기라는 커다란 기계덩이의 ‘인형제국 건국연설’을 경청해야 했던 날이라던가, 그저 반어인의 와인 한 병을 구하려 했을 뿐인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수(魔獸) 키메라를 부리는 도적단에게 쫓기게 돼버린 날이라던가, 아무튼 재수 옴 붙은 날들은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었지만 브루니가 애초에 약속했던 데로 만사가 착착 진행됐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그러니까 하수 처리장에서 끝날 예정이었던 동전 탐색이 수상쩍은 지하유적까지 이어졌어도 사울은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왜냐면 항상 있는 일이니까.

 지하 1층에서 미친 쥐떼들의 습격을 받았을 때도, 거기서 끝날 뻔했던 동전탐색이 뜬금없이 등장한 괴물 덕택에 연장됐을 때도 -물론 격분하기야 했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하는 훼방꾼은 브루니 모험기에 언제나, 항상, 반드시 존재하니까.

    퍽

 

  “ 옆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빨리 비켯!”

  " 분하면 직접 재껴 보시던가!"

 

 하지만 설마 브루니 본인과 어깨싸움을 하며 보물을 향해 질주하는 막장전개를 경험하는 날이 올 줄이야. 사울은 너덜너덜한 레더 아머를 지나 왼쪽 옆구리까지 전해지는 묵직한 충격에, 숨을 몰아쉬는 동안 입안에 스며들어온 땀과 코피의 괴악한 맛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짜증난다. 불쾌하다. 더러운 기분이다. 그리고....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하다.

 비보(秘寶)가 눈에 띌 때마다 현역시절의 집요증을 되살리곤 하는 전직 트레져 헌터 때문에 갖가지 사건에 휘말려봤으니, 거기에 비하면 나름 단출하게 봐줄만한 현 상황을 새삼 두려워하는 것도 우습다. 게다가 지금 저 앞에서 반짝이고 있는 건 여태껏 접해왔던 시시한 잡동사니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엄청난 보물’, 자신의 염원을 실현시켜줄 ‘기적의 동전’이 아닌가. 잠시 후면 저걸 독차지하게 될 테니 도리어 한껏 기대에 부풀어야 정상이 아닐지.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가쁜 숨을 토해내고 있는 브루니의 낯빛이 점점 검푸르게 변해갈수록 사울의 가슴속에선 영문 모를 위화감이 커져가고 있었다. 제기랄,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다시 한 번 그녀의 얼굴을 곁눈질한 청년은 머릿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터무니없지만, 자신이 정말로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이를테면....

   파앗-

 순간, 갑작스런 섬광이 어둠에 익숙해진 청년의 왼쪽 눈을 하얗게 물들였다.

 

  " 큭!"

 

 브루니의 외투 주머니를 통과하자마자 옆으로, 뒤로 흩뿌려지는 빛의 나비들. 졸지에 빛보라에 휘말린 사울은 원근감을 잃고 속도를 늦췄다. 하지만 브루니는 달랐다. 화기를 다루는 사수답게 조명의 급변에 익숙한 것일까 아니면 단순한 치기일까. 그녀는 비틀대면서도 그대로 내달렸고, 덕분에 두 사람의 거리는 열 발자국 가까이 벌어졌다.

 

 “바보~”

 

 하지만 사울은 당황하는 대신 그녀에게 비웃음을 날렸다. 열심히 뛰어봤자 헛수고다. 컴퍼스가 빛을 뿜는다는 건, 분명 녀석들이 가까이에 있다는 뜻이니까.

   kikikikikikiki

 익숙하다 못해 지긋지긋한 울음소리와 함께 백 발자국 즈음 앞쪽의 어둠이 적광으로 물든다. 브루니는 그제야 걸음을 멈추곤 두 팔을 허리에 대며 뒤쪽으로 고개를 삐딱하게 돌렸다.

 

  “....이번엔 당신 차례예요.”

 

 그녀의 미적지근한 휴전선언에 탐탁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 사울은 ‘느림보 2인조’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제 막 정령의 빛이 미치는 곳을 벗어나 이쪽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는 그레이스를 대신해서, 저 멀리 윤곽조차 희끄무레한 곳에 서서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베아트리체와 복식조를 이루기 위해서다.

 저 미친 쥐떼들을 혼자서 상대하는 게 불가능한 이상 협력할 수밖에 없다. 이왕에 협력할 바에야 가장 효율적인 조합으로 최단시간에 녀석들을 박살내는 게 낫다.

 선두자리를 포기할 때마다 되뇌었던 독백을 다시금 반복하며, 사울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였다....아니, 움직이려 했다.

   찍 찍 찍찍-

  콰직 우두둑 우두둑-

 

  “젠장, 이번엔 또 뭐야.......우웩?!”

 

 사울은 지하수로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이곳이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쪽을 향해 몰려오던 적광의 파도가 갑작스레 요동치고, 녀석들의 안광이 하나 둘 꺼져갈 때마다 날카로운 비명과 뼈 씹는 소리가 점점 커져간다.

 

  “.....역겨워.”

 

 비슷한 심정이었던지 브루니가 녀석들의 작태에 대한 감상을 짤막하게 내뱉었다.

 

  “.........?!”

 

 그 순간, 사울은 얼굴을 찌푸리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통로를 메아리치는 으스스한 울림에 금세 사그라진 가냘픈 음성에, 어쩐 일인지 심장이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과 똑같이 짓을 저지른 녀석이 경멸받는 광경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같은 짓? 내가 동족을 잡아먹기라도 했다는 거냐?

 사울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저 어둠속에서 벌어지는 참극에 대한 감정과

      언제부턴가 머릿속을 내내 맴돌고 있는 불쾌함은

               몹시 닮았다.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토르쉐 저택의 누군가에게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딱 적당하게 보들거린다’는 품평을 받은 바 있는 두뇌가 참으로 오랜만에 맹렬하게 움직였다.

 직소퍼즐마냥 조금씩 형태를 갖춰가는 상념을 한동안 응시하자, 깨달음은 금세 찾아왔다.

              결단코, 명확히, 확실히 머리가 아프다.

       어지럽게 흩어져 의미를 잃어버린 기억들을 하나로 이어줄 마법의 조각.

     사지를 옭아매고 있는 정체불명의 주박을 풀어낼 마법의 단어.

 그것이 없는 한 수수께끼를 푸는 건 절대 무리다. 겸허한 자아성찰이 끝나자마자, 흡족함이 가득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좋아. 바로 그거야. 잡생각은 그만두고 나의 소망을, 염원을 이루는 거다.

.......나의..........소망?

 

   휘이이이잉

 사울은 얼굴을 향해 불어온 강풍에 눈을 질끈 감았다. 팔뚝을 들어 앞을 막았는데도 줄기차게 얼굴을 두드려대는 얇고 부드럽고 향기로운 무언가가 조금씩 사그라지자, 고요했던 사방에서 여인들의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온다. 벅차오르는 기대감을 안은 채로, 청년은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오오오옷!“

 

 사울은 거대한 원형 경기장의 한 복판에 서서 수십만의, 아니, 전 세계의 미녀들이 보내오는 뜨거운 눈빛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 꺄아아아악!! 카다프 님!!”

 

 저 하늘 위의 ‘동전’을 맴도는 분홍색 원피스 차림의 천사들이 뿌려대는 꽃비를 맞으며 자지러질 듯 함성을 질러대는 여인들. 그리고 그들이 힘을 합쳐 활짝 펼쳐놓은 거대한 플래카드들. 사울은 감개무량한 눈빛으로 플래카드의 문구를 읽어보았다.

    꿈은 (하트) 이루어진다.        아아, 너무나 멋진 말이다.

    Saul, You Are My Hero!!         감사, 감사합니다!!

    Yo te quiero mucho!               물론 나도 당신을.......

                   Je t'aime!               ..................

          Я Вас Люблю!!                      ..................

 

 사울은 야단스레 흔들고 있던 손을 힘없이 늘어뜨리며, 지척의 관중석에 앉아있는 미녀들의 자태를 눈동자에 전력으로 각인했다.

 

   이렇게 많은 인간들이 를 원하고 있다니, 정말 멋지군.

 

....마침내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사울은 한숨을 푹 내쉬며 응답한다.

 

 하지만 ‘나’의 소망을 방해하는 녀석들은 끝내 여기까지 쫓아오고야 말았던 거야. 그렇지?

  아아, 그 말 그대로다.

 

 갑작스레 나타난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걸까. 열 걸음 즈음 앞쪽에 브루니가 서 있었다. 분명 자신의 등 뒤에도 두 명의 훼방꾼들이 더 있을 테지만, 사울은 차마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꾀죄죄한 몰골의 숙녀가 하늘에 떠있는 동전을 집요하게 노려보며 멈블링을 하는 광경 따윌 또다시 봤다간, 지금껏 뇌리에 열심히 각인시킨 것들이 단박에 날아갈 것 같았으니까.

 

   자, 지금이야말로 훼방꾼들을 제거하는 거다. 그리고 동전을...

 

 사울은 목소리에 대꾸하는 대신 아리따운 관중들을 다시 한 번 주욱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녀들의 앙증맞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마법의 조각’들을 머릿속에 영원히 붙들어두려고 노력했다.

 

  Gosto muito de te I love you Te iubesc Wuhibbuka Ich liebe dich Ch-ha di gärn Ik hou van jou Szeretlek...........................

 

 다시는 겪을 수 없을 퐌타지를 향한 한 줄기 눈물. 사울은 콧물을 훌쩍거리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놈. 변태괴물 주제에 감히 남자의 순정을 농락해?~”

 

 

 

 머릿속에서 외마디 경악성이 들려온 순간, 모든 것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열댓 쌍 밖에 남지 않은 붉은 안광 무더기들은 어둠속을 비척비척 배회하고, 물의 정령이 남기고 간 눈보라 아래 서 있는 괴물은 이미 투명한 얼음덩이에 갇혀 있었으며, 브루니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이쪽을 향해 리볼버를 천천히 들어 올리고 있었다.

 사울은 머리에 쌓인 눈가루를 툭툭 털어내며 뒤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저만치에 떨어져 있는 베아트리체와 맥이 풀렸는지 철퍼덕 주저앉아있는 그레이스가 깜짝 놀라 소리친다.

 

  “ 카다프 씨!”

  “멍청이!! 한 눈 팔지 말아욧!”

 

    타앙

 총성은 눈보라의 마지막 잔음에 파묻혀 금세 사라졌다. 한껏 벌렸던 입을 다물고는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펴는 두 사람. 사울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되돌렸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구를 천장을 향해 치켜들고 있는 브루니가 반쯤 체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심한 욕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그 말만은...”

 

 사울은 웃었다. 그리고 한없이 관대한 마음을 담아 그녀가 몸서리치게 싫어하는 형용사를 연발해주었다.

 

  “집요한 여자. 집요한 여자. 집요한 여자.....”

  “아아악~”

 

 짐짓 고뇌하는 브루니를 내버려둔 채, 사울은 다른 일행들을 향해 비스듬히 몸을 돌렸다. 그리곤 얼음더미에 묻혀 있는 괴물을 엄지로 가리키며 기운차게 소리쳤다.

 

  “그레이스 씨, 저거 클레이모어로 단박에 부숴버리고 빨리 나갑시다! 이 이상 미적거리다간 ‘브루니의 법칙’이 또 다시 발동할지도 모르니까요.”

  “사우울! 누누이 얘기하지만 경쟁자들이 퍼트렸던 헛소문 따윌 진짜로...”

  “큭 큭큭큭큭큭큭큭큭큭큭큭큭큭큭큭큭큭큭큭큭큭큭큭큭큭큭큭....”

 

 브루니의 항변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외투 주머니로부터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머나?”

  “.....벌써 늦었나.”

 

 더 이상 본성을 감출 이유가 없기 때문일까. 불룩하게 도드라졌던 주머니를 홀쭉하게 돌려놓으며 얼음 덩어리 쪽으로 날아가고 있는 나비들은 더 이상 빛을 내고 있지 않았다. 테트라 대유적에서 '환술사'가 내보였던 어둠의 정령을 연상케 할 정도로, 주위의 어둠에조차 녹아들지 못할 정도로 녀석들은 새까맸다.

    콰직 콰지지직

 '동전'을 감싸고 있던 정령의 얼음은 검은 나비들이 표면에 달라붙기가 무섭게 바로 깨져버렸다. 사울 일행이 전투 자세를 취한 순간, 검은 나비들에게 둘러싸인 채 흐느적거리던 '동전'이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자가생성한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개체들이 존재할 줄이야. 인간이란 정말로 흥미로운 생물이군.

 

  "흥미?! 산탄을 머금고 나서도 그따위 헛소릴 지껄일 수 있을까!!"

 

     퍼억 퍽 티잉 팅

 그레이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산탄총이 불을 뿜었지만, 연신 들썩거리는 숙주의 몸뚱이는 물론이고 싸구려 구리조각처럼 보이던 녀석의 본체조차도 의외로 견고했다.

 

  "베아트리체 양!"

  "칠링 터치!"

 

  사울이 얼음 정령의 가호를 앞세워 녀석에게 돌격하려던 순간-

      드드드드드득

   -지진이라도 난 듯 통로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충분히들 쉰 것 같으니, 새로운 놀이를 시작해볼까?

   “거기 섯!”

 

 ‘동전’은 브루니의 속사를 흐트러짐 없이 받아낸 후 어둠속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덩그러니 남겨진 네 사람의 주위를 요란한 굉음이 가득 채웠다.

     드드드드드드드득

         kikikikikikikikikikiki

 너무도 익숙한, 그러나 여태까지와는 규모를 달리하는 소음. 사울과 두 사수가 얼굴을 찌푸리며 얼굴을 마주보는 사이, 베아트리체의 오른손이 붉게 달아올랐다.

 

  “파이어 볼!”

 

   휘이이이이잉

 어둠을 걷어내며 날아가던 불덩이가 벽에 짓눌린 녀석들이 터져 나갈 정도로 통로 전체를 꽉꽉 채우며 달려오는 쥐떼들을 비춘 순간, 네 사람은 바람이 되었다.

by 닉네임 | 2009/01/24 18:20 | 팬픽 중편 | 트랙백 | 덧글(0)

노인은 동전을 원한다 (6)

사실 브루니 에띠엔과 그레이스 베르넬리는 주변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상반된 성격의 소유자들이다. 아니, 브루니가 '인생은 도박'이라는 모토 아래 수상쩍은 분란에 스리슬쩍 고개를 들이미는 한탕주의자라면, 그레이스는 '아르스 모리엔디(ars moriendi;임종의 순간 찾아온다는 악마의 유혹을 견뎌내고 떳떳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방법들을 수록한 책)'를 품고 다니며 그 책의 경구들을 읊조리곤 하는 나이답잖게 진지한 아가씨니, 이 정도면 상반보다는 상극이라는 표현이 더 적당하지 않을까.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두 여자는 인생관과 그 밖의 자질구레한 견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변인들에게 악우사이로 여겨질 만큼의 친분을 주욱 유지해왔는데, 그 이유는 두 사람이 공유하는 남다른 취미, 즉 '닥치고 총기난사'에 대한 각자의 애호도가 상대의 성격차를 감내하고도 남을 정도로 열렬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두 여자가 돈독한 관계를 쌓아가며 '쾌속의 마녀'와 '산탄의 마녀'라는 위명(?)을 널리 떨치는 동안 멋모르고 사라져간 몬스터들의 수는 과연 얼마나 되는가. 유감스럽게도 그 숫자는 아무도, 심지어 본인들조차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식-카르챠 유적의 지하 1층에서 마녀 콤비에게 덤벼들고 있는 시궁창 쥐들 덕택에 예의 사살수가 빠르게 갱신되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상대가 석벽의 사면을 이용해 입체적으로 공격해오는 소형 몬스터였음에도, 브루니는 결코 자신의 페이스를 잃지 않았다.

   타다다다다당-

 그녀는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 ‘칸타빌레’의 방아쇠를 누른 채 왼손으로 해머를 열심히 재껴댔고, 해머가 뇌관을 칠 때마다 허공의 공격자가 한 놈씩 어김없이 낙하했다. 그야말로 일발필중. 속도를 얻는 대신 명중률을 희생하는 대다수 속사수들이 보았다면 사기라며 분통을 터트렸을지도 모를 패닝 샷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쾌속의 마녀의 진짜 특기는 따로 있다.

   철컥 핑 철컥

 딜러가 카드라도 던지는 듯 날렵한 품세로 팔을 뻗으며 오른손 검지로 실린더를 스윙 아웃 시키고, 단 한 번의 스냅으로 탄피 여섯 개를 밖으로 튕겨낸 후 왼손으로 스피드 로더를 삽입하고 팔을 끌어당기며 실린더를 원위치 시킨다.

  타다다다다당

이 모든 동작에 소요되는 시간이 0.5초가 채 되지 않았기에 브루니의 사격은 끊임없이 계속됐고, 눈앞의 허공은 자욱한 초연과, 아직도 공중에 머물러 있는 온갖 죽은 것들과 앞으로 죽을 것들, 그리고 저 앞쪽에 떨어져있는 조명막대의 백광을 반사하며 쉼 없이 떨어져 내리는 탄피들이 뒤섞여 복잡스레 변해갔다.

     타앙          타앙

 그나마 허공의 대혼란이 더 이상 가중되지 않은 건, 브루니의 오른편에 나란히 서서 바닥을 향해 산탄을 난사하고 있는 그레이스 덕분이었다.

           퍼억         퍼억

 회색의 밀물처럼 보일 정도로 잔뜩 밀착한 채 달려오던 쥐떼들은 조명의 범위 내에 들어오는 족족 신경계에 작용하는 독성물질이 코팅된 산탄에 맞아 우왕좌왕하면서 동료들의 전진을 방해하거나 혹은 아예 산산조각이 나서 바닥에 흩어졌다. 녀석들이 앞에서 미적거리는 동료들의 몸뚱이에 이빨과 발톱을 꽂아 넣는 짓까지 불사하며 미친 듯이 달려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레이스는 (위력만큼이나 비싼) 크레이모어 탄에 전혀 손을 대지 않을 정도로 여유를 부리고 있었으니, 쥐떼들은 적에게 육체적인 타격은 고사하고 경제적 손실조차도 주지 못한 채 허무하게 쓰러져 간 셈이다.

 

  " 으아아아압!!"

 

 점점 커져가는 검붉은 웅덩이에 조명막대가 반쯤 잠겨들 때까지 줄기차게 이어지던 공방전은 두 여자의 뒤쪽에서 아스라이 고함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겨우 끝났다.

   찍 찍찍찍찍

 방금 전까지 죽자 사자 달려들던 그 녀석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부리나케 달아나는 적들을 바라보던 브루니는 총구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를 입으로 후 불어대곤 심드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아아, 이제 막 손이 풀리려는 참인데...."

 

 그 말에 공감한다는 듯 상대방에게 미소를 지어보인 그레이스는 말없이 뒤쪽을 향해 시선을 옮겼고, 거의 동시에 브루니도 같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정령을 조명용으로 따로 할애할 여력이 없어선지 저 앞쪽 워록의 주위를 밝히고 있는 건 바닥의 깜부기불뿐이었지만, 희끗하게나마 저쪽의 쥐떼 역시 전사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녀석들 대열의 선두 즈음에서 황금색 불빛이 명멸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모자로 얼굴에 부채질을 하며 불빛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그레이스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 어째 투척 타이밍이 조금 늦.."

 

     " 카다프 씨!! 동전을-"

 

  " 어휴, 정말 뭘 꾸물대는 건지..."

  " 설마 저번처럼 격발 핀도 뽑지 않고 바로 던지는 건 아니겠죠?"

 

 그레이스가 허겁지겁 투척자세를 취하는 사울을 보고 한숨 섞인 푸념을 내뱉자, 브루니는 사울이 빅 코카트리스의 둥지에서 선보였던 추태를 언급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레이스 역시 상대방과 똑같은 표정으로 화답한다.

 

  " 또 그런 바보짓을 저지른다면 이번에야말로 ‘진짜’ 지옥훈련을 시켜줘야겠죠."

  “ 후후후,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저도 도울게요. 괜찮죠?”

  “ 후후후후, 물론 대환영입니다.”

 

    “ 먹어랏!!”

 

 만인의 사수화를 꿈꾸는 두 마녀에 의해 강제 전직(?)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청년은 다행히도 실수 없이 막대 수류탄을 던졌고, 수류탄은 포물선을 그리며 황금색 불빛을 향해 정확히 날아가다가....일제히 공중에 뛰어든 쥐떼에 밀려올라가 헛되이 폭발했다.

   kikikikikikiki

 ‘동전쥐’가 암보라 빛을 발하는 점액에 대롱대롱 엉겨붙어있는 부하들의 헌신을 비웃듯이 반대 방향, 그러니까 이쪽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한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 큭?! 베아트리체 양!”

 

 점액이 떨어지지 않은 아치문 너머를 놔두고 구태여 이쪽을 향해 껑충껑충 뛰어오는 동전쥐에게서 시선을 때지 않은 채로, 사울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베아트리체에게 뛰어가 오른팔로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그 순간, 동전쥐가 땅을 박차고 천장을 향해 날아올랐다.

 오랜 훈련으로 획득한 반사작용에 따라 사울의 눈꺼풀이 움직임을 멈추고, 그의 눈동자가 녀석의 주둥이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동전의 궤적을 재빨리 뒤쫓는다.

    텅

      쉬익 

             텅

 하지만 베아트리체를 보호하는데 신경이 분산된 데다 미처 해제하지 못한 영화가 동전에 닿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겹친 통에 사울의 베기는 날카로움을 잃었고, 동전쥐는 간발의 차이로 검격을 벗어나 오른편 벽을 박차고는 그대로 내달렸다. 꼬리를 흔들며 사라지는 녀석의 뒷모습을 따라가던 두 남녀의 시선이 동료들에게로 옮겨갔다. 브루니는 리볼버를 쥔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며 목표물을 정조준하고 있었고, 그레이스는 산탄총을 어깨에 맨 채로 이제 막 홀스터에서 끌로드-니케를 꺼내는 중이었다.

 

  “ 업드렷!”

 

    탕 탕    탕

 그레이스의 경고에 따라 전사와 워록이 바닥에 납작 엎드리자마자 바로 총성이 이어졌지만, 시야를 어지럽히며 고속으로 달려드는 쥐의 몸통만을 정확히 맞추는 건 결코 쉽지 않다. 브루니가 발사한 탄환 두 발이 동전쥐의 뒤쪽 바닥을 때려댔을 때 녀석은 이미 두 사수의 머리 위를 뛰어넘고 있었고, 녀석의 꽁무니를 노린 그레이스의 응사가 빗나간 후 사울과 베아트리체가 몸을 일으켜 동료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을 즈음엔 이미 한층 더 속도를 붙여 조명막대를 지나치는 중이었다.

                  탕

 동전쥐가 조명의 경계 부근에 도달했을 때 브루니가 또 다시 방아쇠를 당겼지만 결국 녀석의 실루엣은 어둠 속에 파묻혀 버렸고, 그녀는 힘없이 리볼버를 늘어뜨리며 대여섯 걸음 뒤쪽의 두 사람, 정확히는 사울을 향해 원망어린 눈빛을 쏘아댔다.

 

  " 정마알 이러기에요~양손으로 공격했으면 충분히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전에도 말했지만 사울 씬 베아트리체 양을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다구요."

 

 어째선지 두 볼에 홍조를 띈 채 표정관리에 들어간 모 양은 그렇다 치고, 사울은 쥐떼들의 공격에 너덜너덜해진 레더 아머 전면부를 손끝으로 가리키며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때마침 흘러나온 그레이스의 차분한 음성 때문에 청년은 항변의 기회를 놓쳤다.

 

  " 브루니 씨, 아직 실망하긴 일러요.“

  " 수류탄이 또 있어요?! 그럼 빨리 던져요!"

 

 브루니가 의문과 기대가 뒤섞인 목소리로 다그쳤지만, 그레이스는 그저 묘한 미소만을 지어보이곤 조끼 안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찰나의 공백동안 세 남녀의 시선은 은발사수에게서 저 앞쪽, 이미 정밀사격은 고사하고 끈끈이가 닿을지 말지마저도 불확실한 거리까지 멀어져버린 황금색 불빛으로 옮겨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끼릭끼릭

 그리고 일동은 괴짜 발명가의 첫 시제품을 품평하러 온 투자자와 똑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그레이스는 혀를 쏙 내민 채 권총의 꽁무니에 ‘개머리판’으로 추측되는, 쿠션달린 막대기 비스름한 뭔가를 열심히 달고 있었다. 사울이 모두의 마음을 대변해서 질문을 날렸다.

 

  “ 그레이스 씨? 설마 권총으로 저 놈을....”

  “ 권총이라니요!”

 

 그레이스는 열기가 넘쳐나는 외침과 함께 품안에서 성인의 팔 길이 즈음되고 중간에 손잡이가 달린 ‘총열’을 꺼내들었다. 일행이 또 한 번 벙찐 표정을 짓는 동안 끌로드-니케의 절반이 뚝 떨어져나가고, 그 자리에 총열 끄트머리의 기관부가 결합됐다.

 관객들이 ‘저런 걸 주렁주렁 달고 올 정신이 있었으면 차라리 끈끈이를...’이라는 의미가 담긴 눈빛을 교환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레이스가 자못 비장한 목소리로 선언한다.

 

  “ ‘베르넬리 스나이핑 세트’를 장착한 이상, 이 녀석은 사상 최강의 저격총이라고요.”

  “....테스트는 충분히 해 봤겠죠?”

 

 미심쩍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에게 베르넬리는 상큼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 그럭저럭. 뭐...실전에서 써보는 건 처음이지만요.”

  “...”“...” “ 후세에 길이 남겨야 할 예술품에 총알구멍을 낼 작정이에요?!”

  “ 걱정 말아요. 내가 이 모자를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잊었어요? 베아트리체 양, 정령으로 저 녀석 꽁무니를 비춰줘요.”

  " 아, 예!"

 

 손가락에 튕겨져 살짝 비뚤어진 저격수의 모자를 바라보며 고민하고 있는 브루니의 얼굴이 정령의 빛을 받아 희붐하게 밝아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빛의 정령이 방울이 울리는 듯 맑은 소리를 내며 목표물을 향해 쇄도하자, 그레이스는 앉아 쏴 자세를 취하며 저격권총(?)의 개머리판을 어깨에 댔다. 뭔가가 접근해온다는 걸 알아채고 뒤돌아 본걸까. 황금색 불빛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kikikikikiki

 다음 순간 예의 괴성과 함께 불빛이 지그재그로 맹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전쥐의 움직임이 어찌 바뀌든 간에 빛의 정령은 주인의 뜻에 따라 녀석을 열심히 뒤쫓았다.

동전쥐의 꽁무니가 드러날 때까지 남은 시간은 5-

하릴없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사울이 ‘정말 괜찮을까’라고 중얼거리자 4-

브루니의 창백한 얼굴이 가늠좌 너머에서 어지러이 움직이는 목표물을 노려보고 있는 은발사수를 향한다. 3-

 

  " 아아 역시 안돼요!! 귀찮지만 지상으로 돌아가서-"

 

  " 피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미 그레이스는 자신의 혼잣말조차도 들리지 않는 절대무음의 공간에 들어서 있었고, 마침내 정령의 빛이 동전쥐를 감싸고 있던 어둠을 살짝 걷어냈다. 0-

    퉁

 

  "?!!!"

 

 둔탁한 격발음이 울린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곳에 못박혔다. 공중을 선회하고 있는 정령의 빛이 몸뚱이의 반절이 날아간 채 옆으로 엎어져 있는 사체를 비추고 있었고, 두어 번 바닥에 튕긴 끝에 사체보다 대여섯 걸음 앞쪽의 바닥에 놓인 금속조각이 백색의 조명에 노란빛을 섞어 넣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명을 내지를 듯 입을 한껏 벌리고 있던 브루니는 그제야 헛기침을 하며 평상시의 페이스를 되찾았다. 사울이 한숨을 내쉬며 그레이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 나이스 샷. 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지만 어쨌든 끝났군요.”

  “ 그러네요. 아, 저 녀석은 샘플로 가져가죠. 와이드먼 선생님께 드리면 무척 좋아하실 거예요.”

  “ 여러분, 설마 우리의 진정한 목적을 잊은 건 아니겠죠?~언제나 기운이 넘치는 사울 씨, 얼른 뛰어가서 동전을 확보하세요.”

 

  브루니가 짐짓 피곤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등을 떠밀자, 사울은 장난스럽게 허리를 두드려 보이곤 걸음을 빨리했다. 사체와 동전의 형상이 점점 또렷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독특한 취향 때문에 유명을 달리한 회색쥐의 주검을 지나치며 눈 깜짝할 시간동안 묵념한 사울은 녀석에 대한 건 금세 잊고 저 앞쪽 동전에 시선을 집중했다. 과연 전설적인 장인 벨름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는 동전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단박에 동전 앞까지 다가서자, 황금색 빛에 가려져있던 동전의 실체가 마침내 드러났다.

 

  “ 어라?!!”

  “ 왜 그래요?! 설마 흠집이라도 있어요?”

 

 사울은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대꾸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바닥의 ‘동전 비스름한 금속 쪼가리‘를 주워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살펴봐도 눈앞의 물건은 둥글납작하고 여기저기 상처가 난 구리조각에 불과했다.

 

‘ 팔아버리든 어딘가 전시해서 관람료를 받든 수익은 모두 신대륙민을 위해 쓰일 거라고요.’

 

' 꼭 찾아주게. 그 동전은 내 목숨보다 소중한 거라네.'

 

                                                               ' 그동안 죽어간 사람들만 300명이 넘어요.'

 

‘단지 우연이 아닐까요? 조그만 동전 하나에 그런 힘을 담는 건 불가능해요.’

 

                         ' 희대의 장인이 ‘언제까지고 소중히 여겨질 작품을 만들라’는 주문을

                          어떻게 이행했을지 궁금하지 않나요?'

 

‘ 어째서 모두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침묵했던 걸까요?’

 

              ' 꼭 찾아주게. 그 동전은 내 목숨보다 소중한 거라네.'

 

 고개를 저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기억들을 털어내며, 청년은 당혹감과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이게 뭐야....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냐고!“

 

ki kikkikkikkiikikikkkikkikk

 

 그 순간, 청년의 물음에 응답하듯 구리조각에서 괴소가 터져 나왔다.

 

  “ 헉?!”

 

 사울은 화들짝 놀라 구리조각을 공중에 내던졌다. 그에게서 멀어지며 천천히 회전하던 구리조각은-

   파앗

-눈부신 섬광을 내뿜으며 청년의 눈동자에 지고의 미를 깊이 새겨 넣었다.

 

  “ 아아!!”

 

 사울은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아 휘청휘청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눈앞의 광경으로부터 도저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시시각각 색을 달리하며 황홀한 향기를 풍겨오는 꽃들이 만발한 정원, 휘황찬란한 날개를 펄럭이며 꽃과 꽃 사이를 우아하게 부유하는 나비들, 그리고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가슴에 안겨드는 님프 무리들까지....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특히 전신을 어루만지는 나긋나긋한 손길과 귓가에 간질이는 달콤한 숨결이 청년에게 뇌가 녹아내릴 듯 강렬한 기쁨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울은 고작 이 정도에서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너무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온 힘을 다해서 공중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손에 닿지 않는 저 먼 허공에서 천천히 떨어지고 있는 저 ‘동전’이야말로,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저 동전이야말로 이 모든 것들을 뛰어넘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아니, 저것만 붙잡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쾌락이라도 손에 넣을 수 있다.

 어떻게?

   저것만 있으면 간단해. 는 그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어. 그렇지?

 아아, 그래. 저 동전을 반드시 가지고 말겠어.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팅

ki kikikikikikikikiki

 

 사울은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통로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을 낙원에서 추방한 장본인이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회색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없이 소중한 동전을 더러운 주둥이에 꽉 깨문 채로, 내장과 함께 상반신에서 비어져 나온 시뻘건 촉수무더기로 좌우의 벽을 뚫어대며, 녀석은 또다시 부리나케 달아나고 있었다. 사울은 탐욕으로 희번덕거리는 눈동자를 더욱 치켜뜨며 증오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 빌어먹을 쥐새끼가!!! 이번에 잡히면 아예 가루로 만들어 주마!!”

  “ 비켯!!!”

  “ 큭!”

 

 사울은 팔꿈치에 떠밀려 오른쪽으로, 어깨에 떠밀려 왼쪽으로 비틀거렸다.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니 세 여자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뭔가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며 머뭇거린 것도 잠시, 사울 역시 잔뜩 독이 오른 얼굴로 땅을 박찼다.

   누구보다도 먼저 동전을 손에 넣는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이 생각만이 가득했다.

by 닉네임 | 2008/09/03 13:51 | 팬픽 중편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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