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8월 20일
노인은 동전을 원한다 (완)
따사로운 햇살과 포근한 바람이 느껴진다.
어렴풋한 의식으로 차향을 닮은 은은한 향기가 스며든다.
사울은 새끼 고양이의 발바닥마냥 말랑말랑한 머리맡에 볼을 부비며 자신의 심정을 짤막하게 표현했다.
"....냥..."
"....냥?""설마 머리가 이상해 진 건..."
낯익은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오자, 사울은 정신을 잃기 직전의 상황을 비로소 떠올리곤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곤 자신이 칙칙한 지하도나 차디 찬 우물 속이 아니라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잎사귀들을 가득 매단 나무의 그늘 아래 누워 있었음을,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레이스의 허벅지에 머리를 누인 채로 그녀와 다른 두 동료들의 근심어린 시선을 받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방금 전까지 정령들을 부리고 있었던 듯 몸 주위에 희미한 빛의 궤적들을 두르고 있는 베아트리체가 허리를 굽히며 물었다.
“어딘가 아픈 곳이 있나요? 혹시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린다거나 하지는 않아요?”
“음...딱히 통증은 없지만 머리가 약간 무겁네요.”
“아뇨. 상당히 무거워요. 그러니까 당신 머리를 내 허벅지에서 좀 치워주겠어요?”
“....그나저나 내가 어째서 정신을 잃었던 거죠? 내가 던진 창이 브레스를 전부 태워버리고 녀석 이마에 깊이 박히는 것까진 똑똑히 봤는데 그 이후론 기억이...”
“사우울~!”
베아트리체는 청년이 짐짓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에 손을 얹으며 불쌍한 눈빛으로 그레이스의 항의를 무마하는 광경에 실소를 머금으면서도 성실하게 대답했다.
“그 창은 카다프 씨의 의념에 동조한 정령들이 만들어 낸 일종의 정신체라, 당신의 의식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어요. 하지만 카다프 씨가 그 사실을 모르고 끝까지 연결 상태를 끊어내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악령이 마지막 순간 떠올렸던 강렬한 의념들이 창을 통해서 당신에게 흘러들어 왔던 거죠. 카다프 씨, 이번엔 정말로 운이 좋았던 거예요. 정령들이 적극적으로 당신을 보호해주지 않았다면 아예 의식 자체가 날아가 버렸을지도 몰라요.”
“....나 정말 괜찮은 건가요? 후유증 같은 건 없겠죠?”
불치병 선고를 예감한 환자마냥 핼쑥해진 청년에게 정령사가 안심하라는 듯 웃어보였다.
“해로운 기운들은 전부 몰아냈어요. 당분간은 어둠의 기운이 강해질수록 빨리 지친다거나 악몽을 자주 꾼다거나 하겠지만 심한 후유증은 없을 거예요.”
“휴우~그 말을 들으니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사울 씨, 자잘한 얘기들은 가면서 잔뜩 해줄 테니까 일단은 리볼도외로 돌아가요. 의뢰주도 다시 만나고 신개본에 보고서도 제출해야 푹 쉴 수 있잖아요.”
“알았습니다, 갑니다. 에구구구-”
브루니가 짐짓 피곤한 얼굴로 재촉하자 사울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사울에게 남아있던 어둠의 기운들을 몰아내기 위해 하수도를 나오자마자 정령들이 충만한 숲속 깊은 곳까지 들어갔었기 때문에, 일행의 귀로는 꽤 멀었다. 그 덕분이랄까. 어렴풋이 퀸즈 게이트가 보일 즈음, 사울은 자신이 기절하기 직전까지 벌어졌던 기묘한 일들의 내막을 마지막 부분까지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 벨름의 동전에 담겨있던 악령의 정체가 대체 뭡니까? 혹시 셜린이 부리던 그 칙칙한 정령들의 변종 같은 건가요?"
청년의 물음에 답한 건 그 방면의 전문가인 베아트리체였다.
"어둠의 정령을 환영술의 원료로 쓰는 건 그 종들이 자아가 무척 약해서 소환자의 상념을 어그러짐없이 그대로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에서, 간단한 눈속임 정도라면 모를까 장기간 유지되는 환영술을 고등 생명체에게 걸어두려면 사전에 어둠의 정령을 목표물의 체내에 기생시켜서 상대의 정신저항을 회피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죠.
하지만 그 악령은 자아가 무척이나 강했을 뿐더러, 컴퍼스로 위장한 분신이 발하는 환상만으로 목표물의 정신저항력을 낮춘 후 본체에서 발한 사념과 목표물의 상상을 뒤섞는 방식으로 상대를 현혹했어요.
이토록 자아가 강하고 독특한 행동양식을 가진 정신체는 적어도 구대륙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동전에 담겨있던 악령은 신대륙의 특산물에 담긴 채로 구대륙까지 건너갔던 이곳 고유의 정령이든가 아니면....“
“다른 차원의 생명체든가.”
이야기에 열중하다 저도 모르게 끼어들었던 그레이스는 일행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자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동전의 제작자 벨름은 ‘차 상자’처럼 공간을 왜곡시키는 기술이 적용된 공예품을 많이 만들어냈잖아요. 어쩌면 그는 자신의 기술을 개량하는 도중에 악령들이 가득한 이계로 통하는 문을 열어버렸던 건지도 모르죠.”
“어이쿠야, 그런 녀석들이 득실거리는 이계라구요? 어째 얘기가 점점 감당 못할 영역으로 가고 있는 거 같은데...”
양팔로 몸을 감싸며 짐짓 몸서리를 치던 사울은 금세 진지한 얼굴로 돌아와선 일행들을 응시했다.
“....그보다 사실 내가 정말로 알고 싶은 건 따로 있어요. 에우셰비오 씨 말인데...그가 동전을 미끼로 개척민들을 사지에 몰아넣었던 건 자의였을까요 타의였을까요?”
세 사람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들은 청년의 심중을 짐작하고 있으니만치 확답을 내고 싶었지만, 결국 추측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먼저 입을 연 건 그레이스였다.
“그의 영지에서 벌어졌던 학살은 아마 타의였을 거예요. 하지만 악령의 힘이 아무리 강했다고 한들, 그 이후에 에우셰비오 씨가 의식을 회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까요? 동전을 부수거나 멀리 던져버릴 기회가 단 한 번도 없었을까요? 나는 그가 옛 영화를 떠올릴 기념물에 대한 미련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타인의 미래를 스스로 포기했다고 생각해요.”
베아트리체가 미미하게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몬스터 떼와 수백 명의 개척민들을 현혹시켰을 만큼 강력한 정령이 개인에게 그 힘을 온전히 집중한다면, 수십 년 동안 인간을 조종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거예요.”
“글쎄요. 나는 에우셰비오 씨의 의사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은가 싶은데...”
브루니가 말을 이어나갔다.
“만약 에우셰비오 씨가 동전에 숨어있던 무언가에게 줄곧 홀려있었다는 게 진실이라 한들,
이제 와서 사람들이 믿어줄 리가 없잖아요.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괴로운 미래뿐이에요.”
"......실은 정신을 잃고 있던 동안 이상한 영상을, 아니, 악령이 남긴 기억을 보고 있었습니다.“
일행들이 깜짝 놀라 자신을 바라보는 동안, 청년이 말을 이어 나갔다.
“자신이 악령에게 홀렸었다는 걸 모르고 괴로워하다가 결국 자살을 택한 남자와, 영지의 마지막 주민이 자살하는 광경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는 에우셰비오 영주와, 그들의 행동을 연극마냥 감상하고 있는 악령의 감정이 계속해서 흘러들어 왔어요.
악령의 감정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그 남자의 감정은.....도저히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겠습니다. 정신을 잃고 있지 않았다면 나도 그를 따라서 목을 그었을지도 몰라요.......그리고 에우셰비오 씨는.....그 때의 에우셰비오 씨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정신 나간 노인이 아니었습니다.
잿더미가 된 고향을 복구하기 위해서 자진해서 이곳의 영주가 되었는데, 영주민들의 생활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믿었는데 어째서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졌는가...자신이 지금껏 해온 노력들은 이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는가....내가 지은 죄값을 이토록 잔인하게 치르게 된 것인가....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절규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악령이 에우셰비오 씨의 마음에 잠식한 건 아마도 그 직후였겠죠.
괴로운 미래라....분명 그럴 거에요. 하지만.....나는 악령에게서 비로소 벗어난 에우셰비오 씨가 다시금 그 때의 마음을 되살릴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듯한 청년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한층 더 맑고 따스했기에, 세 사람은 어두운 기분을 떨쳐내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가 환상으로 도망치지 않고 자신이 짊어져야 할 것들을 감내하겠다고 결심해서, 자신은 물론이고 뉘우칠 수조차 없는 광인에게 가족들을 희생당한 사람들의 삶에도 조금이나마 변화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꽤나 어려운 일이겠지만...정말로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요.”
일행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방금 전 사울이 그레이스에게 미소로 화답하는 광경을 짐짓 태연스레 바라봤던 브루니의 입가에 최고의 장난거리를 생각해낸 악동마냥 음흉한(?) 미소가 불현듯 떠올랐다.
“아차, 그러고 보니 우리들은 당신이 깨어나길 기다리는 동안 전부 얘기했는데, 사울 씨 당신만 악령에게 홀렸을 때 어떤 환상을 봤는지 아직 고백하지 않았네요~”
“...........음.....그러니까 그게....”
그 말을 듣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뾰로통한 표정이 되어버린 그레이스가 눈에 띄게 창백해진 사울을 외면하며 확신이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보나마나 불결한 망상이 분명한데 굳이 들어볼 필요가 있으려나요?”
"부,불결?! 나야말로 하늘에선 불그죽죽한 홍차비가 내리고 나무에는 총이 주렁주렁 열리는 낙원 따위엔 발끝 하나 들이밀고 싶지 않습니닷!“
“이이이익!! 남의 꿈을 멋대로 괴기물로 바꾸지 맛!”
티격태격하며 폭로전을 개시한 두 남녀와 그들에 의해 증인석에 강제로 호출되어 얼굴 가득 곤혹스런 표정을 더해가고 있는 베아트리체를 향해, 브루니가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아아, 할 수 없네요. 개인적으론 사울 씨의 이상향이 어떤 곳일지 꽤 흥미가 있지만, 그레이스 씨가 정히 원하지 않는다면 그 부분은 생략하고 ‘모두가 궁금해 할 부분’만 들어보죠 뭐.”
“....아니, 전부 생략하셔도 아무 문제없습니다만.”
“그러니까 나는 이 남자의 망상 따윈 조금도 알고 싶지 않다니까요!”
브루니는 그레이스에게 의미심장한 눈웃음을 던지며 명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울 씨, 당신이 환상에서 벗어나는데 결정적으로 도움이 된 기억은 ‘누구와의 기억’이었나요?”
네 사람의 주위를 따사로운 햇살과 포근한 바람 대신 고요함이 가득 채웠다.
휘이이이이잉
초원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바람이 석상마냥 굳어버린 청년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흩어내는 동안, 그레이스와 베아트리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브루니에게 시선을 옮겼다.
세 여자의 시선이 교차한 건 그야말로 한 순간. 하지만 ‘자신이 절대적이고 완벽하며 평등한 애정으로 세상 모든 여성들을 널리 이롭게 하기위해(?)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청년을 갱생시키기 위한 제 1차 비밀협약’은 그 찰나의 시간동안 만장일치로 체결되었다.
사울은 그 사실을 모르기에 헛되이 저항했다.
“...어....그러니까 어떤 특정한 기억이 아니라 동료 여러분들과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어머나, 아무래도 난이도가 너무 높았나보네요. 좋아요, 그럼 사울 씨를 위해서 비슷한 뉘앙스의 다른 질문으로 바꿔줄게요. 자, 나와 그레이스 씨와 베아트리체 양이 물에 빠져서 후우적대고 있습니다. 사울 씨는 누굴 먼저 구할 건가요?”
“비슷한 뉘앙스라니 대체 어디가?!!”
“상당히 비슷한데요.”“매우 유사합니다.”
“........”
그레이스와 베아트리체가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브루니를 거들고 나서자, 사울은 비로소 자신이 사지(?)에 홀로 던져졌음을 깨달았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연신 훔쳐내며 시간을 벌던 사울은 결국 짐짓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하하하, 질문 자체가 너무 이상해서 대답하기가 곤란하네요. 친애하는 두 사수 분께선 나보다 수영을 더 잘하시고 베아트리체 양은 정령사니까 물의 정령을 소환하면....”
"묻는 말에만 대답해 주세요.“라고 베아트리체가 말했다.
“...그러니까, 엄마가 좋아 엄마가 좋아와 동급에 속하는 고차원적인 질문에 그리 쉽게....”
“빨리 빨리!”라고 그레이스가 재촉했다.
“큭! 이런 폭압적인 분위기에선 대답할 수 없어요! 묵비권을 철저하게 행사하겠습니닷!”
그러자 브루니가 짙은 눈웃음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짐짓 충격을 받은 듯 양손을 입가에 가져가며 소리쳤다.
“이럴 수가! 나는 재보(財寶)의 산에서 과감히 눈을 돌리고 사울 씨를 택했건만, 당신은 물에 빠진 나를 구하는 간단하기 짝이 없는 일조차도 못하겠다는 거군요! 아아, 이토록 괴로운 마음을 안고 계속 살아간다면, 언젠가 다시 한 번 비슷한 유혹을 받았을 땐 정반대의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저,정반대의 선택이라니!! 지금 무슨 끔찍한 소릴..!”
철컥
사울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금속음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세워놓은 무기의 끄트머리에 양손을 기댄 채로, 산탄의 마녀가 입을 연다.
“별로 당신한테 흥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당신이 나 이외에 다른 여자를 더 높게 평가한다는 건 내 자존심이 용납지 않아요. 참고로, 내가 환상을 보면서 가장 먼저 겨냥했던 사람은 ...”
그레이스의 의미심장한 눈초리를 견디다 못한 청년은 무의식중에 정령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베아트리체 양!! 이 여자들도 암흑의 기운을 듬뿍 쐰 거 같습니다! 당신의 도움이....컥! 대체 뭘 하려고 전격 팔찌를 착용하고 있는 겁니까!!”
햇살을 받아 짙푸르게 빛나는 양 손목의 팔찌를 드르륵 소리 나게 돌리며, 정령사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카다프 씨,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정령사가 참가함으로써 주체할 수 없이 증가한 골라죽는 재미(?)에 관해 잠시 고찰한 후-
“....말과 행동이 너무 다르잖아!!”
-사울은 절규하며 앞으로 내달렸다.
“앗!”“도망친다!!”
세 여자가 외마디 소리와 함께 청년을 뒤쫓자, 페루초 평원에선 때 아닌 추격전이 벌어졌다.
“결국 대답하지 못하겠다 그거죠?!!”
“나중에 개별적으로 대답해 줄 테니까 좀 봐달라구요!”
“웃기지 말아요!!!”(x3)
여름의 태양이 내리쬐는 초원 가득 왁자지껄한 외침을 남긴 채로, 네 사람은 퀸즈 게이트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끝-
# by | 2009/08/20 14:29 | 팬픽 중편 | 트랙백 | 덧글(0)



